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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기


                  제5기  지방세력의 등장기

780년(선덕왕)∼889년(진성여왕)


「괘릉(원성왕릉)」

이 시기는 왕통상 원성왕 계통인데, 원성왕 자신이 내물왕의 12대손이라 칭함으로써 부활 내물왕 계통이라고 한다. 또한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진골귀족들이 서로 영합하는 형세를 띠면서도 실제로는 각기 독자적인 사병세력을 거느리며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귀족연립 혹은 귀족분열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시야를 조정과 왕실에만 두지 않고 좀더 넓혀 본다면 무엇보다도 지방의 호족세력이 크게 대두했던 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말기에 전개되는 호족의 대동란은 실로 이 시기에 배양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 시대의 개창자인 김양상은 혜공왕을 죽인 뒤 즉위하여 선덕왕(780∼785)이 되었으나, 변혁기의 정치적·사회적 모순도 해결할 겨를도 없이 재위 5년만에 죽고 말아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즉위하여 원성왕(785∼798)이 되었다. 그는 788년 국학출신자에 대한 관리등용제도인 독서삼품과를 제정하는 등 정치개혁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지만, 왕실 가족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짜여짐에 따라 일반귀족들의 불만만 커져갈 뿐이었다.

9세기 초 애장왕(800∼809)때는 숙부 김언승이 임금 대신 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율령을 개정하고 오묘제도를 확립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결국 김언승은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 헌덕왕(809∼826)이 된 뒤에 이같은 정책을 한층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그 결과 왕실가족 중심의 정치체제로부터 소외 당한 귀족들의 불만이 더욱 커져서 822년에는 태종무열왕 계통의 후예인 태천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반란은 비록 짧은 기간 내넹 진압되기는 했지만, 이로써 호족의 지방할거적 경향은 크게 촉진되었다.

9세기를 통해 신라지배층의 사치풍조는 극에 달했다. 이때처럼 외래품을 숭상하던 때는 한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보이다. 그리하여 흥덕왕(826∼836)은 이같은 사태를 바로 잡기 위해 일대 개혁정치를 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개혁의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더욱이 흥덕왕이 죽은 뒤 근친 왕족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 쟁탈전이 벌어져 2년 동안 두 명의 국왕과 한 명의 국왕 후보자가 희생되었다. 이처럼 중앙귀족들이 정권쟁탈에 몰두해 있는 동안 지방의 호족세력들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점차 왕실을 압도할 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청해진을 근거로 한 장보고와 같은 해상세력가들은 그중 두르러진 존재였었다.

그 뒤 경문왕(861∼875)과 헌강왕(875∼886)때에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줄기찬 노력이 기울어졌으나, 이미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너무나 늦었던 것 같다. 정강왕(886∼887)의 뒤를 이어 진성여왕(887∼897)이 즉위했을 때는 사태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국가재정이 파탄에 직면해 있었다. 결국 진성여왕은 889년에 이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 지방의 주군에 강력한 조세 독촉을 명했는데, 이것이 농민들을 반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은 원인이 되고, 결국 신라 조정은 이를 수습하지 못함으로써 장기간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