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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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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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기


                  제3기  중앙집권체제의 완성기

514년(법흥왕)∼654년(진덕여왕)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분황사 모전석탑」

이 시기는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성한 때이다. 그리하여 신라 왕조는 국왕과 여러 귀족과의 일정한 타협과 조화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해 갔다.

「삼국유사」는 이 시대를 ’中古’라 하여 특징하는 한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이 시대는 법흥왕의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정치적 기반이라든지 사회적 기반은 이미 지증왕 때에 대체로 마련되었다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농사를 장려하는 가운데 우경을 시작한 것은 그 뒤의 농업발전에 커다라나 계기가 되었고, 또한 고도로 발달한 중국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였던 것 역시 그렇다. 종래 사용해 왔던 국호를 신라로 확정한 것이라든지, 마립간 대신에 중국식의 ’왕’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505년에 지방제도로서 주·군제도를 채택한 것 등은 모두 국가체제 확립을 위한 조치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502년과 508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북조의 북위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382년 이래 12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섭을 열기도 했던 것이다.

법흥왕(514∼540)때는 이처럼 다져진 토대 위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중요한 조정을 설치하며, 진골 귀족회의를 제도화하는 등 신라의 전반적인 국가체제를 법제화·조직화한 시기였다. 520년에 반포된 율령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관리들의 공복과 17관등, 골품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규정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율령 제정에 앞서 516∼517년 경에는 군사문제를 담당하는 병부가 설치되었고, 그 뒤 531년에는 진골 귀족회의를 위한 상대등 제도를 채택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이는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같은 일련의 획기적인 조치가 있은 뒤인 536년에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은 신라의 통치체제가 확립되어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그 뒤 친당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연호를 쓰게 될 때까지 신라는 115년 간이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같은 기반 위에서 진흥왕(540∼576년)은 대외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켰다. 이미 법흥왕 때에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를 병합하여 다른 여러 가야들을 위협하고 있었던 신라는 진흥왕 때 이르러서는 함안의 아라가야, 창령의 비화가야, 협천의 다라 등을 차례로 병합한 다음 562년에는 이사부로 하여금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킴으로써 기름진 낙동간 유역 전체를 송두리째 차지하게 되었다. 이 대가야 원정에서는 화랑 출신의 사다함이 큰 공을 세웠는데, 화랑제도는 진흥왕 때 국가적으로 제정된 청소년단체였다.

그러나 진흥왕의 정복사업으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이라 하겠다. 신라는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도살성(천안 혹은 증평)과 금현성(전의로 짐작됨)을 빼앗았으며, 그 이듬해엔 ’개국’이라 연호를 고치고, 백제의 성왕과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다. 처음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인 죽령 이북, 고현(철령)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 하였다. 나아가 554년에는 약속 위반에 분격하여 관산성(옥천)으로 쳐들어온 성왕을 죽이고 백제 3만 대군을 섬멸시켰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은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얻는 것 외에,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길을 트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교정책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의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때 함흥평야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이같은 진흥왕때의 정복사업은 창령·북한산·황초령 및 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비와 단양에 있는 적성비가 잘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560년대는 그때까지의 신라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때부터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는 660년대까지 꼭 100년 동안 신라는 국토를 회복하려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게 되어 국가적인 위기에 놓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진평왕(579∼632)때 후반기부터 강화되기 시작한 두 나라의 침략은 선덕여왕(632∼647)이 즉위한 뒤로는 한층 더해갔다. 그리하여 642년에는 한강 방면의 일대 거점인 당항성(남양)이 양국 군대의 합동공격을 받아 함락 직전의 절박한 상태에 놓였으며, 낙동강 방면의 제일선 기지인 대야성(협천)은 백제군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다. 이로써 신라의 서부 국경선은 합천에서 낙동강 동쪽의 경산지방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라는 이처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국가적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신라측의 군사원조 요청에 대하여 당 태종은 여왕 통치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한편 그 대책으로 당의 조정이 신라를 돌보게 하자는 안을 제시함에 따라 신라의 정계는 크게 동요되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신라의 지배층은 분열되고 여왕 지지파와 문벌귀족세력 간에 암투가 벌어지던 중 결국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일파의 반란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이 반란은 여왕을 옹호하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연합세력에 의해서 진압되었고, 마침 내란 중에 선덕여왕이 죽자 그들은 진덕여왕(647∼654)을 옹립하고는 정치·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7년 뒤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김춘추가 즉위, 태종무열왕(654∼661)이 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중고기(中古期)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신라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