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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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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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고분
 
삼국유사의 현장
 
Peter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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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도

 

가. 골품 제도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골품제도이다. 이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제도로 귀족 상호간의 위계질서 확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골품은 성골과 진골이라는 두 개의 골과 육두품에서 일두품의 여섯 개의 두품을 포함하여 8개의 신분으로 초기의 골품제는 형성되었다.

성골은 김씨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나,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하며 성골이 소멸되자 김춘추 때부터는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신라의 멸망때까지 모든 왕들은 진골이었다. 이처럼 같은 왕족이면서도 양자가 구별된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진골에는 신김씨(신김씨)라 하여 본가야의 왕족이라든지 중고시대의 왕비족, 고구려의 왕족출신인 안승 등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비록 본래의 신라왕족과는 구별되기도 하였지만, 김씨 진골과 통혼도 하면서 여러 가지 혜택을 누렸다.

진골아래의 여섯 개의 신분은 뒤에 가면 크게 상하 두 계급으로 구별되었다. 즉,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은 하급귀족으로서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이었으나. 삼두품 이두품 일두품은 그것이 불가능 하여 일반평민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즉 후대로 가면 본래의 8등급의 골품제가 성골이 소멸하고 또한 평민들의 등급구분이 없어지게 된 결과 진골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백성의 5등급으로 정리된다.

이상의 여러 골품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개인의 혈통의 존비에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신분에 따라서 일정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관등의 상한선을 설정하여 정치적 출세를 제약하였다. 이는 신라하대 육두품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으며 반신라 세력을 만들게 하는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다.

정치적 출세는 물론 사회적으로는 같은 신분내에서만 결혼이 가능하고, 가옥의 크기 , 옷의 색깔(복색) 등 사회생활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을 하는 제도인 것이다.

 

나. 화백제도

신라의 정치제도는 합의제도에서 운영되었는데, 이러한 회의체를 화백이라고 불렀다. 그 기원은 연맹왕국시대의 정사당 혹은 남당이라는 제도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제도가 비교적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화백회의장으로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후로 추정된다.  

이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기타 불교의 공인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는 만장일치에 의해서 의결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특히 중대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왕경 사위의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오지산 서쪽의 피전 북쪽의 소금강산 등 이른바 영지를 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막강한 힘을 지닌 화백회의는 집사부의 설치를 계기로 하여 존재의 의의가 줄어들었으며, 특히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전제왕권의 성립과 더불어 화백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체적인 정치운영의 전통은 후대에 들어 비록 변형된 형태이지만 잔존하였다.

 

다. 정치제도

신라의 정치제도는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황때에 최종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으나 그 연원은 매우 깊어 적어도 마립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으로 크게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중앙행정제도
중앙의 통치조직은 법흥왕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병부가 설치되었으며, 귀족회의 의장으로서의 상대등제도가 채택되었다. 그 뒤 진흥왕때 관리의 규찰을 맡은 사정부가 만들어졌고 진평왕때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 공부를 맡은 조부, 예부 등 10개의 관부가 새로이 설치되어 비로소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고, 또한 소속 직원의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어서 일종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뒤 진덕여왕때에는 김춘추 일파에 의해서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집사부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이와 같은 개혁 작업은 김춘추가 왕위에 즉위한 뒤에도 계속 추진되어 삼국통일 직후인 668년(신문왕6)에에 토목을 담당하는 예작부를 설치를 끝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이러한 중앙정치제도는 신라가 멸망할 때 까지 골격을 유지하게 된다.

지방행정제도
지방의 통치조직은 지증왕 때 점령지역의 확보책으로서 설치되었다. 즉, 505년에 신라는 지방제도로서 주군제도를 채택, 실시하였는데 이는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서 때때로 중심을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軍政的)성격을 띠고 있었다. 큰성에 설치한 주의 장관을 군주, 중간 정도규모의 성에 설치한 군의 장관을 당주(幢主)라 하였는데, 뒤에 군주는 총관(摠管)·도독(都督)으로, 당주는 태수(太守)로 각각 그 명칭이 바뀌었다. 소경제도는 주군이 군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하여 주로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했는데, 한편으로는 주군을 견제 감시하는 듯한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장관은 사신이라 하여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다만, 삼국통일 이전의 소경제도는 전국적으로 체계있게 정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로 인해 영토확대가 이루어지면서 지방제도를 확대, 정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작업은 9주5소경제도로 완성되었는데 즉, 9주는 중국의 옛우왕때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를 설치하였다. 또한, 주 밑에는 전국에 117-120개의 군과 293년-305개의 현을 두었다. 한편, 5소경은 대체로 국토의 동서남북중의 방향에 맞추어서 정비되었는데, 이는 왕경이 동남쪽 한 끝에 너무 치우쳐있는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통일기에 있어서의 지방통치조직의 변화는 이같은 각급행정단위의 증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주군제도에 있어서 종전의 군정적 성격이 현저하게 줄어든 대신 행정적 성격이 강화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특히 군현에 파견되는 외관중에 학식이 있는 사람을 등용한 데서 엿볼수 있다. 이것은 결국 신라가 약 1세기동안 생사를 건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안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다.

 

라. 화랑(花郞)제도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신라시대의 청소년 수련단체. 화랑이란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인데, 혹은 화판·선랑·국선·풍월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 군사적·사교적·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골품제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여러 계층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이바지하였습니다.

기원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국가사회에 들어오면서 청소년 단체들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삼국지 후한서 등 여러 곳에 보이고 있습니다.

제정
4세기 들어 신라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사람이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서 등용하려던 제도로서 어여쁜 여성 두명을 가려 단장을 삼게 한 것이었습니다. 흔히 화랑의 전신이라는 원화(原花)제도 였습니다. 처음 원화로 뽑힌 남모와 준정은 무리를 300여명이나 모았으나 얼마 뒤에는 두 여성 사이에 어여쁨을 다투며 시기하는 일이 생겨,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살해하는 사건이 생겨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발전
신라가 통일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많은 병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비록 그 확실한 연대는 알수 없으나 562년 대가야 정벌에 사다함이 화랑의 자격으로 참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이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대화랑은 설원랑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직과 수련방법
조직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한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어 있었으면 이 낭도들의 수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수련방법
일정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한다.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 수련 의무기간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나온 화랑에 대한 기록을 대략 정리해보면 화랑은 대개 15세에서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금강산이나 지리산 등 명승지를 찾아 다니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하였습니다.

성격
무사도로서의 성격과 놀이집단으로서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 궁극적 목표는 무사도로서의 성격입니다.

변천
삼국통일이후 귀족들의 문객 내지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 갑니다.그 뒤 고려시대에 팔관회에서 양가의 자제를 뽑아 그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하는 등 화랑도의 약간의 유풍이 남아있었습니다.

 

마.군사제도

통일이전 군사제도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이 수도를 수비하였다. 신라의 군사제도는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된 진흥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는데 삼국항쟁이 격화된 544년(진흥왕 5) 6개의 부대를 통합하여 대당(大幢)을 편성하였다.
이는 통일이전 신라 군사력의 기본이 되는 6정의 효시로 그 뒤 550년대에 영토의 비약적인 확장과 더불어 점령지에 주를 설치했는데, 이때 주마다 군단을 설치한 결과 종전의 대당 이외에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더불어 설치된 상주정(上州停:552), 한산정(漢山停:604)과 문무왕 때 우수정(牛首停:673), 무열왕 때 하서정(河西停:658), 신문왕 때 완산정(完山停:685) 등 6정(停)을 편성, 각주에 배치되어 주의 이동과 함께 그 소재지가 이동되었다. 대당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정은 모두 지방민을 징발하여 편성된 부대로 생각된다.
이 외에도 서당(誓幢:583), 낭당(郞幢:625)이란 부대를 두어 국방에 힘썼다. 한편 군조직과는 별도로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624)도 있었다.

통일신라
신라의 통일기의 군사조직은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중앙의 9서당 지방의 10정으로 대별된다..

9서당
진평왕5년(583)부터 증설되어 통일 후 신문왕 7년(687) 때에 완성된 9서당은 수도에 주둔한 중앙군단으로서 신라인 외에 고구려 ·백제 ·말갈인 등으로 구성된 왕 직속의 군대이다. 이 9서당은 옷깃의 빛깔에 따라 부대 소속을 구별하였다. 이는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다른 국민에 대한 우환을 덜고 중앙의 병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노린 군사 편제로서 금색(衿色)으로서 부대를 구별하였다.

10정
지방의 군사조직인 10정은 통일 이전에에는 6정으로 편제 되었으나 통일 후(686년) 넓어진 국토를 효율적으로 관리 하기 위해 9주를 기준으로 각 주에 1정씩 배치하고 한주(漢州)는 지역이 넓고 국방상 요지였기 때문에 2개의 정을 설치하였다. 10정이 배치된 곳은 국방상 지방통치의 거점이었다. 이와 같이 배치된 정은 국방 및 경찰의 임무도 겸하였으므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밖에 주 및 변방에 배치된 군단인 5주서(五州誓)와 3변수당(三邊守幢)도 있었고 또 노당(弩幢:弩牛部隊) ·운제당(雲梯幢:登城部隊) ·석투당(石投幢:抛車部隊) ·여갑당(餘甲幢)과 법당(法幢) 등이 있다.

10정의 명칭
 음리화정(音里火停)    - 경북 상주 청리면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 충남 청양 청양면
 거사물정(居斯勿停)   - 전북 임실 청웅면
 삼량화정(參良火停)   - 경북 달성 현풍면
 소삼정(召參停)      - 경남 함양 죽남면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 전남 나주 남평면
 남천정(南川停)      - 경기 이천 주내면
 골내근정(骨內斤停)   - 경기 여주군 여주읍
 벌력천정(伐力川停)   - 강원 홍천 홍천면
 이화혜정(伊火兮停)   - 경북 청송 안덕면

6정의 위치
 대   당(大幢)  - 경주
 귀   당(貴幢)  - 상주
 한산정(漢山停) - 광주(廣州)
 우수정(牛首停) - 춘천
 하서정(河西停) - 강릉
 완산정(完山停) - 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