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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기


                 제4기  삼국통일에 의한 황금시대

654년(태종무열왕)∼780년(혜공왕)


「안압지 (月池)」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최대 전성기를 맞은 때였다. 태종무열왕은 오랜기간에 걸친 나라의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거꾸로 일대 반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조국수호 전쟁을 삼국통일 전쟁으로 대전환 시킨 것이다. 비록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이듬해에 그 빛나는 생애를 끝마쳤지만, 그의 위업은 아들 문무왕(661∼681)에게 인계되어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다시금 당의 군대를 한반도 안에서 몰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이 삼국통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은 화랑도와 화랑 출신의 장수들이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강력한 전제왕권을 구축한 것과, 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점을 들 수 있다. 신라가 이 시기에 전제왕권을 구축한 요인을 지적하면 이렇다. 첫째, 태종무열왕과 그 아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성취함으로써 왕실의 권위가 커지게 된 점, 둘째,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귀족이 도태괴고 지방세력이 강화된 점, 셋째, 집사부 중심의 행정체계와 유교적 정치이념이 되입된 점, 그리고 나아가 이로 인해 관료제도가 발달하게 된 점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집사부 중심의 정치운영은 전제왕권의 안전판 구실을 했다. 집사부는 651년에 김춘추 일파가 당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만든 국왕 직속의 최고 부서로 왕권을 전제화 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전제왕권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직후인 신문왕(681∼692)때에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히 탄압했을 뿐 아니라, 통일에 따른 중앙·지방의 여러 행정과 군사조직을 개편하였다. 중국제도를 모방하여 6전체제를 갖춘 것이나, 제일급 중앙행정기관의 관원제도를 다섯 단계로 정비한 것, 지방에 아홉 개 주를 비롯하여 다섯 소경을 설치한 것, 서울과 지방에 각기 9서당과 10정의 군사조직을 배치한 것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8세기초 성덕왕(702∼737)때는 전제왕권 아래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불국사」

그러나 한편으로 전제왕권에 수반되는 정치적·사회적 모순 또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신라 문화의 일대 황금시대인 경덕왕(742∼765)때는 전제왕권이 기로에 서게 되기도 했는데, 일찍이 폐지된 바 있는 진골귀족들의 녹읍이 구족들의 요구로 757년에 부활되었던 것이 그 예이다. 이같은 귀족들의 반발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757년에는 전국의 모든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759년에는 다시금 모든 관청과 관직 이름을 역시 중국식으로 고치는 등 일련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했다. 하지만 국왕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하려던 그의 정치개혁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경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혜공왕(765∼780)때는 바야흐로 전제왕권의 몰락기로서, 친왕파와 반왕파 사이에 전후 여섯 차례에 걸친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경덕왕 말년부터 제작에 착수했던 성덕대왕 신종은 어려움 끝에 771년 말에나 가까스로 완성되기도 했다. 특히 768년에 일어난 귀족 대공의 반란은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오랜 암투 끝에 이윽고 774년에는 반왕파의 중심인물인 김양상이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780년에 이르러 혜공왕은 김양상(뒤의 선덕왕)과 김경신(뒤의 원성왕)등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태종무열왕 계통은 끊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