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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기


                    제2기  연맹왕국 발전기

356년(내물마립간)∼514년(지증왕)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

이 시기는 연맹왕국의 발전기로 다음에 전개될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준비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를 특징 지우는 것은 왕호 마립간이다. 지금까지 신라가 왕의 호칭으로 사용해 온 거서간이 차차웅, 이사금 등은 그다지 권력자의 의미를 띠지 못했던 것인데, 내물마립간(356∼402)때부터 쓰기 시작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의 지배자 혹은 으뜸가는 지배자라는 말뜻 그대로 종전에 비하여 훨씬 강화된 권력자라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시대는 그 왕호를 따라서 흔히 마립간 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대부터는 김씨가 독점으로 왕위를 세습하게 되며, 특히 5세기 중반 이후에는 왕실의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한 왕위 부자상속 제도가 확립된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다는 걸 뜻하는 것이다. 신라 내물마립간 때는 377년, 382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의 협조로 중국 북조의 전진에 사신을 보낸 일이 있었다. 382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는 전진의 국왕 부견이 "경이 말한 해동의 사정이 전과 같지 않다니 무 슨뜻인가"라고 질문하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나라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이 지금 해동은 달라지고 있습니다."라고 했다는데, 이는 당시 신라가 또다른 모습으로 비약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신라는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원조를 받기도 했다. 유명한 광개토왕 비문을 보면 340년엔 5만명의 고구려 기병과 보병을 신라 국경지대로 출동시켜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와 위나라의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멀리 낙동강 중하류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대릉원내 천마총 입구

그러나 이같은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그 뒤 신라의 왕위계승에 작용하는 등, 전반적으로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 427년엔 고구려가 통구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신라는 이에 불안을 느껴 433년에는 지금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와 혼인동맹을 맺는다. 중원부에서 발견된 고구려비는 신라가 바야흐로 고구려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475년엔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이로 인해 신라와 백제는 다시금 혼인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한층 강화했으며, 일선지대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했다.

한편 이 시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 여러 조치를 단행했다. 종래의 혈연에 의한 여섯 부를 개편하기 위해 469년에는 경주의 구역 이름들을 명확히 구별해서 정했으며, 487년에는 사방에 우편소를 설치했고, 다시 490년엔 수도에 시장을 열러 물자를 원활하게 유통하도록 했다. 5세기를 통해서 신라가 왕권을 꾸준히 강화하고 있었음은 이 시기에 축조된 황남대총을 비롯한 수많은 고총고분들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487년 혹은 지증왕(500∼514)때에 설치된 김씨 왕실의 종묘에 해당되는 신궁은 바로 이같은 정치적 변화를 상징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금년 봄에 경주 북쪽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고신라비는 당시 신라 정치체제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