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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기원과 의미
 
불상의 발생
 
보살의 개념
 
불상 - 조상의 기본
 
석등의 의미
 
부도의 의미



탑의 기원과 의미

 

1. 탑의 기원과 의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자 다비를 하여 연고가 있는 나라와 부족들이 사리를 나누어 각각 탑을 세우니 이를 일러 "팔분사리탑(八分舍利塔)"이라 부르는 것으로 불교에서의 탑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즉 탑이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운 건조물을 가리키는데, 신라시대의 금석문에는 산스크리트어 stupa를 음역하여 솔도파(솔堵婆) 또는 팔리어 thupa를 음역하여 탑(塔婆)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부처님의 법(法,진리,다르마)을 모시는 경우도 있어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같이 진귀한 물건과 함께 경전을 모심으로써 진신사리를 대신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법신사리 라고 한다.
 
 
 
 
2. 탑의 전파와 우리나라의 탑

   팔분사리탑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보여지고 그후 아쇼카왕(阿育王)이 여덟탑을해체하여 팔만 사천의 탑을 전국에 세웠다고 전하나 이 역시 확인이 안되고 있으며, 현재 인도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탑으로는 중부인도의 작은 도시 산치의 언덕에 있는 3기의 탑이 있다. 그 가운데 ’산치제1탑’(기원전 3세기경으로 추정)의 현재 모습을 개략하면, 둥근기단(基壇) 위에 사발을 엎어놓은 모습의 복발(覆鉢)을 설치하여 사리를 모시고 그 위에 네모난 평두(平頭)를 두고는 거기에 높은 분을 받든다는 의미에서 햇빛을 가리고자 하여 양산모양의 산개(傘蓋)를 세개 겹쳐 놓았다.  

 이러한 탑이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간다라(서북 인도지역, 현재의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역)지방을 거쳐 중국에 전해질 때 다층 누각(多層樓閣, 석굴의 부조에서 확인됨)의 형태로 건립되거나 황하유역에서 다층 전탑(塼塔,벽돌을 쌓은 탑)으로 변화된다.

 

 

  (1)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탑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평양 청암리 절터의 팔각형 기단, 백제의 부여 군수리 절터와 익산 제석사 절터의 네모기단, 신라의 경주 황룡사 절터 등에서 목탑(木塔, 나무를 써서 지은 누각모양의 탑)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처음 우리나라에 탑이 전래될 때에는 목탑이 먼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언제인지는 모르나 전탑이 전래되었는데 경주 분황사에는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 남아 있고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전탑들이 안동을 중심으로 신세동 7층전탑.동부동 5층전탑.조탑동 5층전탑, 칠곡 송림사 5층전탑 등이 있다.  

 백제에서 목탑을 번안하여 모습은 목탑에 가깝게 두고 재료만 돌을 사용하여 세운탑〔석탑, 石塔〕으로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터의 서탑과 부여 정림사터의 5층석탑을 들수 있다. 

  한편 신라에서의 석탑은 분황사의 모전석탑이나 아마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 있는 5층석탑의 원형이 되지 않을까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안산암이라고 하는 암석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탑으로 사방에는 감실이 만들어져 있어 원래는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셨으리라고 추측된다. 

  또한 탑리5층석탑은 바위를 군데군데 박은 언덕〔부처님의 법은 만고에 불변으로 굳센 반석과 같다는 의미로 돌 산을 형상화 한것〕위에 단층기단을 만들어 한 면에 4개의 기둥모양을 조각하고 그 위에 탑의 몸을 만들었다. 남쪽면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감실을 만들었는데 특히 주목되는 점은 감실의 양쪽 기둥 위에 주두(柱頭, 한옥의 기둥 위에 얹는 공포를 받치는 네모난 목재)가 있고 벽면 위쪽으로는 방(枋)을 놓은점 또한 목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옥개석은 아랫면과 윗면 모두를 돌을 사용하면서도 층단을 만들어 전탑을 모방함으로써 석탑이면서도 분황사 석탑과는 또다른 모습의 모전석탑을 형성하여 신라만의 독특한 목탑과 전탑을 혼합한 형태의 석탑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전석탑은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전형의 석탑은 삼국이 통일된 직후(682년)에 세워진 경주 감은사터 동.서3층석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두층의 기단 위에 탑의 몸돌〔塔身, 屋身〕을 놓고 탑 지붕〔屋蓋〕을 만들었으며 3층 지붕 위에는 상륜부를 만들어 올렸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노반과 상륜부를 꽂았던 찰주 기둥만 남아 있다. 1층기단에는 갓기둥〔隅柱〕과 안기둥〔撑柱〕 3개를 조각하고 2층기단에는 갓기둥과 안기둥 2개를 조각하였으며 각층의 탑 몸돌에도 갓기둥을 조각한 점과 탑 지붕의 윗면〔落水面〕을 한옥지붕 처럼 만든점은 목탑을 모방하였으며 탑 지붕의 아랫면〔屋蓋받침〕을 5단의 층층〔層級〕으로 만든점은 전탑을 모방하였다고 보여진다.   

 이런 석탑은 경주 고선사터 3층석탑, 경주 나원리 5층석탑, 금릉 갈항사터 동.서3층석탑, 남원 실상사 동.서 3층석탑, 장흥 보림사 동.서 3층석탑 등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많은 유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감은사에서 시작된 같은 모양의 쌍탑형의 가람배치가 유행하였으며 이후 불국사에서와 같이 쌍탑이기는 하되 두 탑의 모습이 다른 쌍탑형을 만들기도 하였다. 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1층기단의 안기둥은 2개 또는 1개로, 2층기단의 안기둥은 1개로, 탑지붕의 아랫면 받침은 5단에서 4단 또는 3단으로 줄어들면서 기단과 탑 몸돌의 각면에 불법을 호위하는 12지신장상, 팔부신장상, 사천왕상, 인왕상, 불상 등을 조각하여 장식하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아울러 탑의 규모는 작아지면서 탑 몸이나 탑 지붕을 몇개의 돌을 합쳐 만들던 것을 한돌을 사용하게되고, 특이하게는 기단을 직육면체 몇개를 모아 만든다거나 돌사자가 탑을 받치게 하는 다른형들 더구나 불국사 다보탑과 같은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전형의 석탑만이 유행한 것은 아니고 앞에서도 언급한 모전석탑과 전탑도 많이 남아있으며 경주 사천왕사터, 보문사터, 망덕사터를 비롯한 여러곳에 쌍탑의 형태든 단탑의 형태든 많은 수의 목탑터를 남기고 있다.

 
 (2) 고려시대의 탑파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신라전형의 석탑을 이어받은 남계원 7층석탑, 예천 개심사터 5층석탑 등과 같이 탑 지붕이 얕아지거나 탑 몸돌 받침돌이 커지는점이 특징이며, 백제의 옛 지역에서는 탑 몸돌이 상당히 길어지는 형태가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독특한 형태의 석탑으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김제 금산사 6각 다층석탑에서와 같은 청석탑이 다수 등장하며, 월정사 팔각9층석탑과 같은 특이한 형태, 또 원나라의 영향에 의한 경천사터 10층 대리암 탑이 나타나기도 한다.

 

 (3) 조선시대의 탑파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많은 수를 남기지는 못하였으나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낙산사 7층석탑, 대리암으로 만든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원각사터 10층석탑 등 다수를 남기고 있다.

탑의 기원과 의미




불상의 발생




보살의 개념




불상 - 조상의 기본




석등의 의미




부도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