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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활성
 
Peter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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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장수사터

 

김대성과 토함산 장수사터

 

 

름 모를 온갖 생명들이 새움을 틔우는 봄이 오면 너 나 할 것 없이 가슴을 활짝 열고 새로운 기운을 맞으러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가 보다.

 분수가 하늘 높이 시원스럽게 뿜어대는 보문호를 돌아 불국사 방향으로 차를 몰아 토함산 서쪽자락에 있는 장수사터로 향하였다. 신라의 동쪽에 위치한 해발 745m의 토함산은 석탈해왕이 동악 산신이 된 곳으로  신라인들에게 영산(靈山)으로 숭앙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경덕왕 10년(751)에 창건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불국사 아래에 있는 코오롱호텔 현관 앞을 지나 마동마을 입구의 시민휴게소를 돌아 동네 안으로 접어들자 곧바로 3층석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이 바로 『삼국유사』권 제5 ’대성 효2세부모’조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과 인연이 있는 장수사(長壽寺)터 라고 전하는 곳이다.

「대성은 장성하여 사냥하기를 즐겼는데,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큰 곰 한 마리를 잡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 어쩔 수 없이 현재 석탑이 있는 이 마을 부근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날 밤 꿈에 낮에 사냥에서 잡은 곰이 귀신으로 변신하여 대성에게 덤벼들면서 말하기를 "네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자 "그러면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느냐 "겁에 질린 대성은 절을 지어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악몽 같은 꿈에서 깨어난 대성의 온몸에 땀이 흘러 이부자리를 흥건히 적시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꾼 대성은 생명 있는 짐승을 함부로 죽이게 된 것을 크게 뉘우치고 그 후로는 사냥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으며, 곰을 잡은 자리에 넋을 기리기 위해 절을 지어 장수사(長壽寺) 또는 웅수사(熊壽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대성의 두 생에 걸친 출생과 지극한 신앙심은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신라 최고의 가람을 건립하는 동기가 되었다. 또, 꿈을 꾼 자리에는 몽성사(夢成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하나 정확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장수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국사를 불질렀을 때 담화((曇華)스님이 장수사로 잠시 몸을 피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 절터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이곳이 장수사터가 분명하다면 절터에 조선시대의 유물이 남아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흔한 조선시대 기와조각이라도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정식 발굴을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하기 어렵지만, 아마 특별한 검증 없이 불국사에서 가장 가까이에 남아 있는 탑과 절터를 두고 장수사로 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내문에도 馬洞寺址三層石塔으로 되어있다)

  토함산을 배경으로 남향한 절터에는 높이 4.5m의 3층석탑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초에 조성된 감은사지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에 비하여 웅장하지는 않으나 세련되고 안정감 있는 모습은 가까이에 있는 불국사 석가탑을 빼 닮은 8세기 후반경에 세워진 탑으로 추정된다.  현재 상륜부의 노반이 없어진 것과 상하 기단부 갑석 일부가 깨어져 없어진 것 외에는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보물 9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5단의 받침을 한 각 층의 지붕돌(屋蓋石)은 볼 수록 정교하다. 그리고, 지붕돌 끝에 남아있는 풍경을 매달았던 흔적은 아득한 소리되어 천 삼 백년 전의 소리로 들려오는 듯하다.

  수 년 전에 우연히 이곳에서 수습한, 무릎을 꿇고 향로를 받들어 공양하는 암막새 조각을 줍고 기뻐했던 기억이 새롭다. 병풍처럼 둘러진 토함산을 올려다보았으나 곰을 쫓던 대성의 메아리와 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짓던 망치소리와 나무를 깎는 대패 소리만 아련히 그려질 뿐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 하나 남아있지 않다. 여기 저기 둘러보는 사이에 토함산 산봉우리에는 거북 모양의 비구름이 낮게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