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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활성
 
Peter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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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스님과 석장사

 

양지스님과 석장사
 

 
울 날씨 답지않게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더니 1월말 들어서는 매서운 추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추위가 누그러진 오후를 택해 일행은 신라 최고의 예술가였던 양지스님께서 부처님의 세계를 조각예술로서 담아내었던 흔적을 찾기 위해 석장사지로 향하였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의 정문에서 왼쪽으로 돌아 석장동 입구에 이르자 ’석장사길’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팻말을 따라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500m 쯤에 일반 주택처럼 보이는 재실이 있고, 바로 위쪽의 저수지를 지나  10여분을 올라가니 신우대가 무성한 곳에 석장사지(錫杖寺址) 팻말이 일행을 반겨주었다.

그러나 절터의 흔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유물은 여기저기 흩어진 기와조각과 축대처럼 보이는 석단의 흔적 뿐 이었다. 기대보다 실망감이 컸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동국대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6) 때에 양지스님은 절에 제(祭)가 있을 때면 지팡이(錫杖) 끝에 시주할 포대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다니며 시주를 받아왔다고 하며, 그런 연유에서 절 이름도 ’석장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양지스님은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와 법림사라는 절의 현판도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각은 물론 그림, 글씨에도 능통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유물로 전하는 것은 조각품 몇 점이 전부였다.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사천왕전은 스님께서 남기신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만하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전(塼)은 부처님 나라를 지키는 사천왕이 갑옷을 입고 악귀를 누르고 있는 형상이다. 발 밑에 짓눌린 아귀의 모습은 고통을 호소하기 보다 익살스러운 느낌마져 든다. 이 작품은 아무리 사악한 악귀라도 부처님의 교화를 통해서 부처님의 수행자가 되는.. , 악귀를 영원한 악의 상징으로 보기보다 악귀도 인격을 가진 개체로 해석한 스님의 예술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유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만들 때 온 나라 사람들이 앞 다투어 진흙을 나르며 불렀다고하는 가사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1285년경)만 하더라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일을 할 때에 즐겨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 닦으러 오네.

이와 같이 삼국유사에는 양지스님과 석장사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석장사지를 발굴하기 전까지는 스님의 예술 세계는 물론 절터에 대한 확실한 단서조차 잡지 못하다가 1986년과 1992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의 2차례에 걸친 조사에 의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석장사는 7-8세기에 걸친 암자규모의 산지가람 이었으며, 고려, 조선시대까지 시대를 달리하면서 건물이 축조되었다.

 그 과정에서 前代(전대)의 석재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양지스님이 주석할 당시의 건물 유구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수많은 탑상문전은 전탑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알려 주었고, 『삼국유사』의 3천불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유물이기도 하다. 특히 소조 보살상과 신장상, 연기법송명탑상문전 등은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울러 이곳이 석장사였음을 확인시켜 준 유물인 ’錫杖’이라고 쓴 묵서  자기가 출토된 것은 발굴의 최대 성과였다.

그 결과 이제까지 삼국유사와 민간에 구전되어 오던 석장사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양지스님의 예술세계에 대한 수수께기를 일부나마 풀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발굴 뒤에 주변정비를 소홀히 한 탓인지 산사태로 매몰된 때문인지 어지럽게 허물어진 현장은 일행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어디선가 한 마리 비둘기 울음소리가 서글피 골짜기에 메아리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