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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활성
 
Peter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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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법사와 금곡사

 

원광법사(圓光法師)와 금곡사
 

삼국유사의 현장을 찾아 떠나는 날은 언제나 수수께끼같은 의문을 떠올리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출발하게 된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금곡사는 꽤 오래간만에 가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삼국유사』"원광서학조" 말미의 기록과 같이 삼기산 금곡사에 원광법사의 부도가 있다고 한 사실과 또, 화랑에게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주신 신라의 고승 원광법사께서 수도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매우 흥미를 끄는 곳이다.

경주에서 927번 도로를 따라 안강시내로 접어들어 영천 방면으로 가다보면 하곡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뚝 아랫길을 따라 두류리 마지막 동네에 이르면 조그만 저수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결코 평탄하지 않은 심산유곡의 산길을 따라 원광법사를 뵈러가던 화랑의 마음을 헤아리며 절터 부근까지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다.

원광법사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84세에 황룡사에서 앉은 자세로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30세에는 안강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 들어가 수도하였으며, 589년(진평왕 11)에는 중국의 진(陳)으로 유학하여 600년에 귀국한 뒤 이곳 삼기산에 머물렀다. 한 때 가슬사(加悉寺)에 머물러 있을 때 화랑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서 종신토록 지닐 계명(誡命)을 구하자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이 세속오계는 화랑의 실천덕목으로 지켜져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1,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금곡사 주변에는 화재에 의해 붉게 변한 기와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이 중에는 조선시대의 도자기편 들도 있어 조선 중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법등을 지켜온 것으로 생각된다. 절터 앞마당에는 초층탑신(몸돌)위에 2. 3층의 옥개석(지붕돌)을 얹어놓은 완전치 못한 석탑과 기단석 일부가 남아있다. 특히 초층탑신 사면에는 3단의 테두리를 두른 뒤 아취형 장막을 만들고, 아취 안쪽에는 깊이 약 6㎝의 감실을 파고 1구씩 여래좌상을 돋을 새김 하였다. 각 면의 여래상은 모두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으며, 큼직한 육계와 풍만한 얼굴에는 위엄보다 자비스러움이 넘친다.

동쪽의 여래상은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겠고, 남면의 여래상은 석가모니가 주위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부처가 되던 순간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석가여래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서, 남면의 여래상은 존명을 분명히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사방불은 대승불교의 발달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던 신앙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탑의 지붕돌 받침은 4단이고,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하였으며, 네 모서리의 귀들림이 경쾌하다. 그리고 2층 지붕돌 중앙에는 사리를 보관하였던 구멍이 있다고 한다. 3층 지붕돌에는 감은사 삼층석탑의 상륜부에 남아있는 찰주(쇠기둥)와 같은 것을 꽂았던 흔적인 찰주공이 남아있다. 그래서 사방에 감실이 있다는 점과 옥개석에 설치된 사리공·탑에 비해 큰 찰주공을 신라석탑의 고식 형태를 계승한 탑으로 보아 이 탑의 건립 시기를 8세기경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 9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이 탑을 일부에서는 원광법사의 부도로 추정하기도 하나 이것은 탑의 조성양식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석탑의 기원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건조된 것으로 볼 때 특별히 원광법사의 부도만 삼층석탑 형태로 조성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일반형 삼층석탑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원광법사의 부도는 어디에 있을까 ?  어떤 형태였을까 ?  어느 곳에서도 그 답을 찾을만한 단서를 찾을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금곡사터가 신라의 고승이신 원광법사의 자취가 서려있는 유적지임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