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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활성
 
Peter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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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사 천 왕 사

신라의 호국사찰로 유명한 사천왕사를 찾았다.

신라의 왕궁이었던 반월성 동남쪽에 높이 115m의 낭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낭산에는 제27대 선덕여왕릉을 비롯하여 의상대사가 출가하여 삭발한 곳으로 유명한 황복사지와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등 많은 신라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항복을 받았지만 당은 백제와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라는 군정기관을 설치하고, 장차 신라마저도 저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의도로 신라 문무왕 14년(674)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는 부처님의 힘으로 당을 막아내고자 하는 염원으로 세운 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사천왕사에는 도솔가, 산화가, 제망매가 등 주옥같은 향가를 지으신 월명스님이 살고 계셨는데, 피리를 잘 불어 지나가는 달이 그 피리소리에 멈추었을 정도라는 내용이 전한다. 그래서 사천왕사 앞 동네를 월명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최근에는 월명스님을 기리고자 경주지역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월명재를 올리고 있다.

《삼국유사》권2 기이 문호왕법민조에 사천왕사의 창건 배경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 고종이 몇 번이나 신라를 치려고 하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당에 와 있던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불러 꾸짖고 옥에 가둔 후 장차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김인문은 당에 유학을 와 있던 의상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의상은 급히 귀국하여 당의 침략 야욕을 신라에 전했다. 이에 문무왕은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용궁에서 비법을 배워와 신통력이 대단하다는 명랑법사에게 그 대책을 묻게 되었다.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에 있는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나 미처 절을 착공하기도 전에 당군이 쳐들어 온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명랑법사는 임시로 오색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써 오방에 신장을 만들어 모시고 유가명승 열 두분과 더불어 문두루비법으로 기원을 드렸다. 그러자 당군은 신라군과 대적도 하기 전에 바다에 사나운 풍랑이 일어 당의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뒤 절을 완성하며 사천왕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즉 사천왕사는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위해 기도를 드려 당군을 물리친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로써 신라 7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현재 이 절터는 그 옛날의 웅장했던 모습은 볼 수 없고, 다만 주춧돌만이 그 옛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절터에는 목탑을 동서로 세웠던 정교하게 다듬어진 주춧돌(초석)과 금당(대웅전), 좌우 경루, 강당지 등의 유적이 남아있고 최근에 민가가 있던 주변을 정비했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조사된 이래 아직까지 우리의 손으로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일본인이 강당을 가로지르도록 의도적으로 놓은 철도를 아직도 우리가 이용하고 있으며, 바로 앞쪽에는 불국사로 향하는 4차선 국도가 지나고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는 몇 년전 차량사고로 금이 가 있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귀부는 목이 잘린 채 논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철도와 도로가 이설 되어 신라 호국의 산실인 이곳을 국민의 도량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해마다 사천왕사터를 찾을 때면 월명스님의 "제망매가" 한 수가 천년 세월의 무상함을 생각나게 한다.

 

        생사의 길은 여기 있으매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