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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활성
 
Peter Winter
 
문화재이해도우미



전 도림사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살다간 곳에는 그들이 남긴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남아 있기 마련이지만, 그 형태가 오늘날까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기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없어지거나 흔적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적들이 현재 어떠한 상태로 남아 있던 간에 그 나름의 생명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유적지를 찾아 천년 또는 더 먼 시간적 공간을 넘나들며 선조들과 진솔하고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선도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발견의 기쁨도 함께 누릴 수 있다.

  신라 역대 왕중에는 진평왕과 함께 신체적으로 특이했던 48대 경문왕(861∼874)의 이야기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 설화는 신라 호국대찰이었던 황룡사와 원효대사께서 주석하시면서 대중불교를 설파했던 분황사 동쪽, 경포산업도로변 소나무 숲속에 도림사지로 전하는 폐허된 절터 속에 묻혀 있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갑자기 귀가 길어져 항상 귀를 감추고 살았기 때문에 복두를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이 이 기이한 비밀을 알고 있었지만 복두장은 왕의 비밀을 말하지 못하다가 죽을 때가 돼서야 홀로 도림사의 대숲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우리 임금님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고, 그 후로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는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이에 날란 경문왕은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대신 산수유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리 임금님의 귀는 길다"라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오늘에까지 전하고 있다. 이 도림사의 위치를 삼국유사에는 入道林이라고만 밝히고 있어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일연스님은 "예전에 서울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숲에 있다."하였으며, 동경잡기에는 북천(알천)의 홍수를 막기위해 5리나 되는 숲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분황사에서 보문단지로 가는 4차선 도로변은 고목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1930년경 한 일본인이 "道林"이라 새겨진 명문기와를 이 절터 주변에서 수습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숲으로 가득찼던 이 주변에 도림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확실한 근거를 찾기 위해서는 사지에 대한 발굴과 연구를 통해서 밝혀 지겠지만, 현재 도림사로 추정하고 있는 절터에는 분황사 모전석탑의 석재와 비슷한 두께 3cm, 5cm에서 부터 7cm, 9cm 크기의 붉고 납작한 안산암의 전돌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또 부처님의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은 근육질의 사나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부의 침입을 막는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인왕상은 가로 80cm, 세로 150cm 정도인데, 분황사 모전석탑의 예와 마찬가지로 1층 탑신부 4면에 설치된 감실 양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각수법 또한 비슷하여 조성시기를 7세기 중엽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외에 석탑 지붕돌 2기가 남아 있으나 본래 전탑과 같이 있었던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주변의 논, 밭에는 초석 일부와 함께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기와편에서 이 사찰의 규모가 결코 적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