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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활성
 
Peter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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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선사


                    일연선사
인각사

신라문화진흥원 편집부에서는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서 일연선사가 지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찰의 현장을 찾아보고자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200여개의 사찰 중 그 첫 번째로 저자인 일연선사가 말년에 머물렀던 곳이며 그의 부도와 비가 있는 인각사를 찾았다.

일연선사는 1206년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14세에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2세인 1227년 승과에 급제 한 뒤 비슬산 무주암과 묘문암에서 수도하셨다. 44세인 1249년에는 남해의 정림사와 지리산 길상암에, 1264년에는 영일 오어사에 계시다가 대구 가까운 인흥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학승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72세인 1277년에는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시다가 충렬왕에 의해 국존에 추대되었고,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284년에 인각사로 와서 구산문도회를 연뒤 1289년 이곳에서 입적하셨다.

 인각사는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면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대구에서 가려면 서대구에서 칠곡 송림사를 지나 창평에서 가는 길이 있고, 경주에서는 영천을 지나 신령재 가는 길이 있다. 절 앞에는 피래미가 노니는 강이 흐르고 깍아지른 듯한 학소대가 있어 이곳을 한번쯤 가본 사람이라면 주변의 경관에 매료된다. 사찰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2채 그리고 석불 한 구와 석탑, 일연선사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일연선사비는 일연스님이 입적한지 5년되는 1295년(충렬왕 21)에 세운 것인데 민지가 글을 지었으며 왕희지 글자를 집자하였다. 비의 크기는 높이 약 2m, 너비 1m, 비석의 두께는 약 5cm 정도 된다. 비문의 내용은 영일 청하 보경사 주지 진전대사가 비를 세운 경위와 다비시의 영험 그리고 일연문도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비석이 깨어지고 마모된 채로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 비가 마모된 것은 예전에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때에 오래된 비석에 새긴 글자를 떼어 갈아 마시면 급제한다는 미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비의 앞쪽에 있는 일연선사의 부도에는 "보각국사정조탑비"라는 2행의 비명이 음각되어 있다. 원래 이 부도는 절에서 1km 떨어진 부도골이라는 골짜기에 도괴된 채 있었는데, 한말 일인들이 사리를 탈취하기 위해 저지른 소행이었다고 한다. 또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무지로 인해 훼손된 것도 적지 않은데, 이 부도비도 일인들에 의해 파손된 것을 묘를 쓰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 부도의 형태는 신라, 고려부도의 기본형인 8각 원당형으로 상하대가 있고, 그 사이에 8각 간주석이 끼워져 있으며, 각 면에는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도 8각으로 전면에는 기명과 후면에는 문비형이 새겨져 있고, 좌우 6면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상 2구가 새겨져 있으며 상륜부가 갖추어져 있다. 이 부도는 상륜부의 일부만 경내에 남아 있었는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부도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어느 유적지를 가든지 그러한 단서를 제공해 줄만한 자료가 없는지 눈여겨 봐야할 것이다. 신라시대의 부도와 같이 화려하고 장엄하지는 못하지만 일연선사의 부도라는 것이 확실히 밝혀진 만큼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찰 바깥에는 1평도 채 안 되는 보존각에 파손된 석조여래조상이 모셔져 있다. 풍만한 상호와 딱 벌어진 어깨는 통일신라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연선사가 찬 한 시 한 구절을 음미해 본다.

          "즐겁던 한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한끼밥 짖는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줄 내 인제 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