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5-09-08 00:00
선택과 동경(소금강산지구 답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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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시간을 찾아 나선 하늘-헌덕왕릉]

인생에서 늘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생긴다. 손등과 손바닥 식으로.
이쪽과 저쪽 중 어느 한 곳을 버려야 한다. 그때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늘 100% 옳은 결론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래서 늘 이쪽에 서서 저쪽에 대해 동경과 미련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과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함께 한다. 매년 어쩌다 한번씩 참석했던 답사를 올해는 결석 없이 참석하는 것이 목표여서 나 스스로 정한 약속을 깨뜨리기도 싫고 또 반가운 얼굴들과 고운 꽃들이 기다리는 저쪽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고. 몸은 여기 있고 마음은 저기 신경이 쓰이고.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겹쳐져 있어 어쩔 수 없이 한쪽만을 선택해야 했을 때의 난감함.... 그런 날이였다.

나비가 가까이 날아들고 있어서인지 먼 길 오시는 분들이 좀 늦어지고. 가랑비 뿌리는 날씨에 오늘도 바람불지 않음에 다행(?)스러워하며 탈해왕릉에 도착했다.
탈해왕릉은 경주시 북서쪽 동천동에 있는 원형 토분(土墳)으로 전면은 평지이나 후면은 약간 높다. 봉분 이외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다. 고교시절 자연보호운동을 내세워 주변정화를 하러 왔던 시절과 별 변화 없이 무덤을 지키는 소나무들만이 세월의 흔적만큼 휘어지고 구부러져 비를 맞으며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표암((瓢巖-밝바위)는 “박바위” “밝은 바위(光明巖)”라는 뜻을 가진 바위로 탈해왕릉(脫解王陵) 서북쪽의 박바우산에 있다. 경주이씨 시조이자 신라 6촌(六村) 가운데 근본이 되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경주이씨의 근원지이며 신라건국의 산실이자 화백이라는 민주정치 제도가 시작된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을 새기기 위해 1806년(순조 6)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이어 1925년 표암재(瓢巖齋)가 건립되고 전사청(典祀廳) 내외삼문(內外三門) 경모대비(景慕大碑) 등이 건립되었다.

소금강산은 경주의 북쪽에 위치하며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진 곳인 백률사와 사면석불이 남아 있는 굴불사 터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景德王)때 왕이 백률사로 행차를 하는 길에 어디선가 염불소리가 땅속에서 들려 땅을 파보니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가 나와 왕의 명에 의해 절이 세워지고 땅속에서 부처를 파내었다는 뜻으로 굴불사(堀佛寺)라고 했다고 유래한다.
큰 사각 바위의 4면에 조각된 불상으로 서쪽면에 아미타삼존불 동쪽면에 약사여래좌상 북쪽면에 보살상 남쪽면에 삼존입상을 새겼다. 특히 북쪽면 보살상 중 한 분은 얼굴이 열 하나 팔이 여섯 달린 관세음보살입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불상조각에 있어 입체 양각 음각의 입상 좌상등을 변화있게 배치하고 풍만하고 부드러운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는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가운데 금고(金鼓)에는 굴석사(堀石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사방불 사방에 초를 꽂고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작은 돌집들이 있다. 절이 없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사방불은 소금강산의 많은 바위들처럼 그냥 비를 맞고 서 있는 모습이 자연의 부분인 것 같아서 더 정감을 주고 있었다. 간절한 소망을 지니신 듯한 어느 분은 정갈히 초를 밝히고 한참동안이나 두 손을 모으고 불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 비를 맞으며.

백률사 대웅전 동쪽 암벽에 삼층탑이 음각되어 있으나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알아보기 힘들다. 신라시대작품이며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암벽에 만들었다고 한다. 법당을 가득 채우고도 대웅전 마당에 가득한 기도객들은 비를 맞으며 간절히 독송을 하고 있었고 그 틈사이를 비집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불경한 것 같아서 그냥 살그머니 자리를 떴다.
백률사 대웅전 뒤쪽으로 난 등산길을 따라 오르면 소금강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4호인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이 있다. 지금은 바위면이 떨어지고 이끼가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기가 어려웠다. 가운데 여래상은 민머리이며 두광(頭光)을 이중으로 하였고 왼손은 무릎에 올리고 오른손은 들어올린 것 같다. 오른쪽 보살상은 정면을 향하지 않고 본존을 향하고 앉은 모습이 특이하다. 왼쪽 보살상은 얼굴과 몸체부분 바위가 떨어져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머리에 쓴 관에 불상이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주불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대세지보살로 판단되고 옷의 조각수법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열심히 담아오는 안내판의 설명들이 답사기를 적을 때 좋은 컨닝 페이퍼(?) 역할을 한다. 마애불위쪽에는 애기며느리밥풀이 곱게 피어 있었다.

따뜻한 돌솥밥으로 배불리 점심을 먹고 걸어서 도착한 배롱나무가 피고 또 지고 있는 1999년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 동천동 사방불이 자리 하고 있었다. 이 석조물은 탑에 사용된 몸돌로 보여지며 통일신라시대양식으로 네 면에 조금 파들어간듯이 조각된 불상은 좌상으로 각각 다른 수인을 하고 있지만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모두 갖추고 있다. 네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있는 부처를 상징하는데 이곳의 불상은 일반적인 사방불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네면의 아래쪽에 앞으로 튀어나온 받침에 8개의 3겹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
1982년 주변의 택지 조성 관계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탑신석은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것이다

용강동 고분군은 사적 제328호로 개무덤 또는 고려장으로 불리우던 폐무덤으로 파괴가 심하여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발굴조사하였다. 축조시기가 7세기 말과 8세기 초로 추정되고 무엇보다 인물토용과 청동제십이지상의 출토는 지금까지 그 예가 없는 처음 발견된 일로 기록되었으며 또한 신라의 무덤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노태우 정권 시절 추진한 주택 200만호 건설이라는 국책사업 때문에 이 일대에서는 신석기 시대 이래 청동기시대 마을과 분묘 신라시대 마을과 제철 관련 유적 외에 각종 고분군 등이 무수하게 확인됐음에도 현장은 보존되지 못하고 아파트 등이 들어서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고분만큼은 기적처럼 살아 남아 밀집한 아파트 숲 한 가운데에 마치 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헌덕왕릉은 원형의 토분(土墳)으로 쓸쓸한 소나무들만이 능을 지키고 있었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돼지(亥)상 등 5개만 남아 있다. 왕릉주변에는 좀목형 수까치깨 들깨풀 담배풀 쥐꼬리망초 무릇등 고운 녀석들이 반기고 있었다.
진평왕릉에 올 때면 늘 느끼는 일이지만 사람들마다 나름의 감동의 채널이 다름을 실감한다. 유홍준선생이 느낀 감동이 전해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평왕릉에서는 탁 트인 가을들녘 풍경이 마음 가득 다가온다. 여기서 보는 이질풀은 유독 색감이 곱다.

황룡사지 가는 길에는 황금코스모스가 이미 온 가을을 실감하게 하고..
너른 분지 위에 발달한 도시가 경주이다. 그러기에 경주는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황룡사 터에 서 보면 사방으로 확 트인 시야가 ‘바로 여기가 천년 왕국의 넉넉한 중심지였다’고 소리 없이 외치는 듯하다. 비 그치고 불어오는 삽상한 바람과 탁 터인 황룡사 옛터에서 멀리 보이는 남산과 두 그루 나무 사이의 미탄사지 3층석탑이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김호상선생은 황룡사지의 복원계획과 경주권의 문화재 정비사업에 대하여 열띤 설명을 하고..

안압지는 고등학교 졸업사진을 찍으려고 아직 개장을 앞둔 초겨울에 들렀던 옛 기억들을 더듬게 한다. 그 시절에 내가 꿈꾸던 내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
좀작살나무열매가 보랏빛으로 익어가고 있었고 수련이 피어나고 .계요등을 만났고 물옥잠을 보고.

표암(瓢巖)에서 경주이씨시조발상지(慶州李氏始祖發祥地)를 알리는 비와 신라좌명공신급량부대인이공휘알평유허비(新羅佐命功臣及梁部大人李公諱謁平遺墟碑)를 보면서 또 헌강왕릉과 진평왕릉의 무덤의 진위에 대해서 김호상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성역화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깊이 생각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되어 이근직선생의 신라 능묘의 전승과정 연구(新羅 陵墓의 傳承過程 硏究)의 일부분을 옮겨 본다.

[新羅 陵墓는 신라가 고려에 歸附한 이후인 고려시대부터 상당수가 잊혀지기 시작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이르는 조선전기까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서 확인되듯이 金克己나 曹偉와 같은 유학자들이 방문하여 시문을 짓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관심 외에 달리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 왕릉의 전승과정에 많은 변화가 보이는데 이는 문중을 중심으로 한 족보의 간행과 더불어 진행된 사회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각 문중은 강화된 유교적 혈연원리를 바탕으로 始祖와 顯祖의 陵墓에 대하여 급격한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新羅 陵墓에 관한 관심을 이전의 시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하였다. 그러한 조선후기의 時代思潮 아래 1730년 이후 진행된 王陵 指定 및 再調整作業은 사회상의 변화와 더불어 문헌기록을 존중하던 태도에서 무원칙으로의 전환를 보이면서 20세기초에 와서야 비로소 일단락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과정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해당 門中에 의해 일부 왕릉을 재조정하거나 관련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능묘들이 증가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관련자료의 새로운 발굴과 고고학의 발달로 원성왕릉과 문무왕릉이 전승과정의 屈曲으로부터 벗어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오래 기간을 두고 능묘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현상은 陵享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문중의 기능과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새로운 陵墓의 증가가 문헌의 엄밀한 고증이나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 慶北史學 23집(문경현교수정년퇴임기념논총) 경북사학회2000

덧붙임
가끔씩은 그런 동화같은 생각에 빠지곤 한다. 손오공의 머리카락이 있다면?
아니면 아기공룡둘리의 /호이/하는 주문을 욀 수 있다면 좋겠다는.
한 몸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또 다른 한 몸은 집안일도 처리하고 좋아하는 일도 하고... 참 철없는 상상이다.
답사기를 올릴 때마다 늦음에 대해 늘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된다.
집안일도 있었고 나비가 우리집 담장 일부도 무너뜨렸고...
사진 올리기에 있는 사진을 함께 보시면 답사기 보시기에 이해가 쉬울듯도 한데 잘 안보시는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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