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5-07-06 00:00
마음을 담다(중원지구답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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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대원-석등 화사석 화창을 통해 본 미륵불

울엄마가 내게 불만처럼 늘 하시는 말씀들 중의 하나는 “내가 시켰으면 저리 열심히 안 할거다”이다. 답사를 떠나기 위해 한주를 참 부지런히 보냈다. 꼭 보고 싶었던 뮤지컬 때문에 답사를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금요일 빡빡한 회의일정을 쪼개어 공연을 보고 늦은 저녁 마음 한가득 행복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꾸리고 나니 2시였다. 아침에 비가 엄청 올 것이라는 울엄마의 염려담긴 만류를 뿌리치고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떠난다는 것은 늘 새로운 설레임으로 행복하다.
경상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늘은 조금씩 개이기 시작했고 비 개인 뒤의 산자락에 걸린 운무와 정갈한 풍경들이 이번 답사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느끼게 한다.

하나. 괴산이불병좌상(槐山院豊里 磨崖佛坐像)
이번 답사의 시작이다. 다음번에 본 유적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신라문화권의 유적들과는 대비되는 것들이 많았다. 중원권 답사는 시작부터 장대한 규모에 놀라고 있다. 그리고 화려함이다. 신라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가 전파되는 시기였기 때문인지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는데 고려의 유적들은 국가적인 불교융성에 힘입어서인지 규모와 화려함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게 한다.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전(傳) 대전사지출토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광배(光背)에는 화불(化佛)이 조각되었으나 세부수법은 마멸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오른쪽 하단에는 채색의 흔적이 보이고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틈에는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흐린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모두의 시선은 유적뿐만 아니라 여리고 고운 녀석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까치수영이 무리져 있었고 홑왕원추리도 고운 색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둘. 미륵대원
미륵입상을 보시고 어느 분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대불이 많은 시기는 난세라고 하더이다. 지금도 대불조성불사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죠. 작금도 난세인 모양입니다” . 고대 부여국에서는 난세가 되면 “성군이 덕이 없어...” 하며 임금을 바꿨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미륵대원 초입에는 엄마 등을 오르는 아기 거북이 두 마리가 있는 귀부와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이 그 크기로 보는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 미륵불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위치는 석등과 석탑 중간쯤인데 어느 안내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부처님을 뵙고 그 얼굴이 화사하고 자비롭고 웃는 듯이 느껴지면 당신의 마음이 착한 증거요 부처님의 존안이 밉고 화사하지 않게 보이면 당신의 마음이 사악하다는 증거입니다 ”
모두들 충주전통문답회 이길순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을 때 석등의 화사석에 뚫린 화창을 통해 작은 키에 까치발을 하고서 미륵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미륵님에게 나는 착한 중생이 못되는 듯 한결같은 자비로운 모습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표정과 느낌들을 보여주셨다.
미륵님 얼굴이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탓에 서변호사님은 이 곳 미륵님께 절하면 저절로 깨끗하고 고운 얼굴이 된다고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다른 자료에 보면 전문가들은 석불입상 뒤에 있는 석굴 석재는 퇴색되어 고태가 나는데 반해 이 석불입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화사한데에 대해 석굴의 돌들이 다 튈 정도로 큰 화재가 났었다면 그 안의 불상도 지금처럼 생생하게 남을 수가 없고 석굴 윗부분이 건축물로 덮여 있었다면 불상에 갓이 필요 없었을 것이므로 나중에 화재로 그을린 얼굴 부분을 교체하고 갓을 씌우지 않았을까 라고 추정하고 있다. 즉 석불입상이 몸통과 얼굴 부분이 조성연대가 다를 것이라는 추정이다.
미륵대원에서 하늘재(너무 시(詩)적인 고개이름이다)가는 길을 향해 오르면 전형적인 통일신라양식의 삼층석탑과 석공들의 연습용이었을 것 같은 누구(?) 키만한 불두를 만날수 있다. 계곡에는 불상대좌로 추정되는 석재가 방치되어 있었고 담쟁이는 하늘로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오르내리면서 큰뱀무 세잎쥐손이 병아리난초 도랑둑에 핀 물레나물을 만났다.

셋.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
사자빈신사지에서 사자빈신은 사자빈신비구니(獅子頻迅比丘尼)에서 유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엄경"에 선재동자가 보살의 지혜와 행을 묻기 위하여 방문한 53선지식 가운데 25번째 선지식인 사자빈신비구니(獅子頻迅比丘尼)는 선재동자에게 "일체지를 성취하는 해탈문"을 설한다.
조금은 날카로움이 사라진 판관포청천(?)의 모습을 하신 비로자나불은 화사하게 만개한 연꽃이 새겨진 탑신부를 온 몸으로 떠받치고 계셨고 뒷모습에서 보여주시는 두건을 맨 매듭은 남산의 냉골석조여래좌상에 견줄 만큼 아름다웠다.
최인환선생님 의견처럼 1층 몸돌 윗면에 새겨진 연잎들은 이 유물이 탑이 아니고 부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넷. 덕주산성
덕주산성 입구에서 차를 내리자 도로 옆 계곡에 발 담구고 싶어졌다. 그러나 본분에 충실(?)하고자 산성성문에 올랐다. 방어를 위한 축성이였지만 내게는 정상을 향해 있는 계단들과 숲이 어우러진 풍경만 크게 다가왔다. 눈 맑고 부지런한 분들이 계곡건너 바위틈에서 꼬리진달래(겨우살이참꽃나무)를 찾아내시고 서변호사님의 망원경으로 보시느라 분주하고 이홍렬선생은 혼자만 그사이 계곡에 담근 발을 여유롭게 닦고 있었다.

다섯-중앙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중원(中原)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언제나 들어도 참 좋다. 무언가 넓고 확 펼쳐진 개방감을 전해준다. 그래서 축구경기의 포지션중에서 미드필더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중앙탑은 높은 토단위에 우뚝 서서 중원이 가지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남한강은 물안개로 자욱하여 아련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중앙탑 주변은 조각공원으로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고 모두들 탑은 뒤로 하고 강가로 향하여 철부지 아이들마냥 즐거워하며 사진 찍느라 바빴다.
자귀나무와 왕자귀나무가 서로 이웃하여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달라요 하며 피어 있었다.
충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는 어김없이 무두불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수석의 고장답게 별관입구에는 잘 생긴 녀석들이 좌우에 있었는데 서변호사님 말씀으로 기암괴석(?)이라 하셨는데 어느 녀석이 기암인지 또 어느 녀석이 괴석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하나 더 물안개와 안개의 차이를 아느냐고 질문을 던지셨다. 정답이 무엇인지 혹 궁금하시면 답사기를 끝까지 읽어주시길... ...

여섯-중원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지만 내게는 내용을 판독할 능력이 부족하여 얼른 출석용 사진 한 장과 우리말로 비문을 해설해 놓은 안내판을 사진에 담고서 버스에 올랐다.

일곱-신륵사
신륵사의 밤은 길 떠난 나그네를 잠 못 들게 하고 새벽녘 창을 열자 비가 내리고... ...
여주를 흐르는 남한강의 아름다움에 반한 시인묵객들이 "여강(麗江)"이라고 부르며 많은 시와 글을 남겼고 신륵사(神勒寺)앞 강가에 지은 정자인 강월헌(江月軒)에서 바라보는 여강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고들 했는데 정말 그런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했다.
입구의 꽃들과 비 먹은 쪽동백을 보고 즐거워하며 강가에 다다르자 빗속의 남한강 새벽 물안개가 강월헌을 휩싸고 돌아 나오는 아련한 풍경에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안개너머로 황포돛대를 볼 수 있었으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비 오는 새벽의 부산함에 추녀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던 멍멍이 한 녀석은 무슨 일이냐는 듯 반눈을 뜨고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금당 앞의 다층석탑은 대리석에 비룡이 조각되어 있었고 조사당 건물은 비오는 날과 어울리는 운치를 주고 있었다. 심검당 앞의 댓돌은 특이하게도 나무를 사용하고 있었다. 같은 용도로 사용되어지기는 하나 나무를 댓돌(?)이라고 이름 불러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제존자 부도앞 석등의 상대석에 새겨진 비천상들은 새벽녘 미명을 뚫고 금방이라고 고운 날개옷을 날리며 하늘로 향할 것 같은 생동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일한 고려의 벽돌(塼)탑인 다층전탑을 못 보고 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지난밤 네모난 문명의 이기(?)가 없던 시절을 기억하며 여주도자기박람회용으로 지어진 막구조물 아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직업의식(?)을 못 버리고 구조물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저 부분과 저 부분을 사진 찍어서 사무실 녀석들에게 보여주면 공부가 되겠다고 보아둔 것들을 담느라 좀 늦었는데 그 사이 다른 분들은 금꿩의다리를 보고 오셨다한다.
“금꿩의다리” 얼마나 보고 싶었던 녀석이었는데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보신 분들을 재촉하며 나섰다. 비를 담고 있는 녀석들의 자태를 뭐라 표현해야 할까? 도감에서 나를 매혹시켰던 모습보다 훨씬 고혹적이였다. 마음속에 담아 둔 고운님을 만나 가슴 설레고 두근거리는 느낌이 이럴까!?.
강월헌의 풍경도 앞으로 남은 유적지들도 감동스럽고 또 감동스럽겠지만 금꿩의다리를 만난 것으로 이번 답사는 충분히 행복하다.

여덟-고달사지
고달사터부도(국보제4호)는 원종대사부도(보물제7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연곡사 동부도에 견줄 만큼 세련된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었고 거북 용 연꽃 사천왕 비천상 문주장식등의 조각은 고려불교미술의 정수를 보는 듯했다.
부도들을 보고 부도비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이사장님께서 보물과 국보의 차이를 알겠느냐는(느꼈냐는) 질문을 하셨다. 순간 답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왜냐면 보물인 원종대사부도에서는 달랑 사진 한 장 담아 놓고서(유적 답사온 본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타래난초를 만나 너무 신이 나서 타래난초를 곱게 담아보려고 덤벙대며 위 아래로 왔다 갔다 하느라 기억 속에 원종대사 부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도비의 이수와 귀부 연화대좌의 조각의 정교함은 부도에서와 같이 감탄을 자아냈고 연화대좌의 크기를 감안하여 대좌에 앉으신 부처님 모습을 그려보았다. 더불어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도 제 위치로 옮겨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아홉-법천사지
진리가 샘물처럼 솟아난다는 법천사(法泉寺)의 지광국사 부도비에는 외래종 루드베키아가 만발해 있었고 어른신들은 그 녀석들부터 뽑아내고 계셨다.
법천사는 법상종의 지방 중심사찰로서 고려 초기부터 중요성을 갖는 사찰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창건과 폐사에 관한 자료가 전하는 것이 소략하여 그 존속시기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매우 적다. 고려사(高麗史)를 포함한 몇 가지의 역사서와 지리지에서 일부 편린들을 찾을 수 있으나 매우 적고 지광국사현모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의 내용이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나 법천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일부 내용이 전하고 있으나 조선초기의 유학자들에 관한 것이 있을 뿐이다. 후대의 자료들은 이러한 내용을 재인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법천사의 가람배치(伽藍配置)를 밝혀줄 획기적인 자료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다만 절터 주변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 지광국사 부도비 광배연화문대석 용머리 답계석(踏階石)등의 유물을 통하여 그 규모와 화려했던 영화를 짐작할 뿐이다.

열-거돈사터
지나면서 한글로 표시된 부론이란 지명을 보면서 뭔가 아름다운 이름이라 상상했는데 한자(富論)를 알고 나니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조금은 실망스러워졌다. 거돈사터에서 만난 삼층석탑은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거대한 화강석 불대좌에 부처님은 아니 계시고 이홍렬선생이 등신불(?)의 모습으로 화신하였다.
원공국사부도가 있었던 곳으로 올라가면서 멀리 삼층석탑과 불상대좌 그리고 천년수령의 느티나무를 조망해 보니 노래제목처럼 한 폭의 풍경이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갑자기 비가 굵어지자 이런 날씨에 바람불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들 하신다. 진흥원식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늘 긍정적(?)이다.
원공국사부도가 있던 자리는 안내판만 남아 있고 아쉬운 마음에 안내판의 부도사진을 다시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제자리가 남아 있는 유물들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원공국사 부도비는 비신은 가늘고 상부는 비대한 조형 경향을 보여 준다. 특히 이수(螭首)조각은 지극히 사실적이여서 용들은 흐린 하늘로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변의 둘레는 수직집선대(垂直集線帶)를 새겨 장식한 점이 장엄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법당이나 절 마당이 손바닥 만하다고 부처님의 말씀이 작아질까? 법당은 맑고 마당이 정갈하다면 그곳은 언제나 부처님의 큰 가르침으로 가득하고 "부처님"이라는 그 이름만으로 모자라는 권위가 없을 듯한데 당신이 계신 곳이 남루하다고 당신이 남루한 것이 아니며 당신의 말씀이 초라해지는 것은 아닐텐데...
고달사터 법천사터 거돈사터. 어디까지가 절터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만큼의 이런 규모의 사찰을 운영하려면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있었겠냐는 어느 분의 말씀처럼 조선의 억불정책이 조금은 수긍(?)이 갈 듯도 했다.

장마의 한가운데서 비를 비켜가기도 하고 비를 즐기기도 하면서 보낸 이번 답사는 내게 금꿩의다리와 타래난초를 만나게 해 주였고 고려불교미술의 정수를 볼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들이였다. 당분간은 이 행복감이 나를 넉넉하게 해 줄 것이다.

덧붙임.
비를 맞고 다녀서인지 햇살이 그리운 시간들이다. 몸도 마음도 다 눅눅해져 해바라기를 하고 싶다. 뽀송뽀송하게. 자발적인 참여에서 시작한 이 일들이 왜? 숙제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월요일은 꽃사진을 화요일엔 유적사진을. 그리고 며칠을 걸쳐 수요일을 넘기면 안 될 것 같은 부담감으로 틈틈이 답사기를 적었다.(그러다 보니 집중하지 못해서 중간 중간 다시 홈피에 가서 수정중임)
혹 함께 하지 않으신 분들께서 보신다면 사진올리기의 사진들을 먼저 보시고 답사기를 읽으시면 도움이 될 듯도 한데......
하나 더 정답-노래 부르는 가수가 다름(허무하시다면 서보석변호사님께 항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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