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5-06-07 00:00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삶(안강지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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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입구 자계천(紫溪川) 폭포

햇살은 계절의 변화를 가장 쉽게 알려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놀라 깨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으로 여름이 왔음을 실감한다. 햇살에 놀라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마당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는 나무들에게 아는 척 하기로 했다. 누군가 나에게 만날 때마다 낯설어 하면서 이름을 되묻는다면 얼마나 속상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 아침 마당을 나설 때마다 만나는 녀석들의 이름을 알아내기로 했다.

오늘은 반가운 얼굴들이 모두 모였을까? 새로운 식구들이 왔을까? 궁금해 하며 진흥원에 들어섰다. 낯익은 이들과 인사를 건네고 양동마을을 향해 나섰다. 양동마을어귀에서 버스를 내리는 순간 내가 지니고 있었던 기억속의 양동마을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많이 바꿔져 있음에 조금은 씁쓸해졌다. 학부시절에 한국건축사수업을 위해 매주 찾아왔던 내 기억속의 반촌((班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옛 양반들의 삶을 더듬어가는 양동마을 답사는 설천정사(雪川精舍)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길잡이 이영돈선생은 진흥원식구로서의 소속감과 서로를 좀 더 알아가기 위해 모두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하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
설천정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3호로 북촌의 입구에서 첫 번째 산등성이의 안쪽인 영귀정(詠歸亭) 서북부쪽에 자리잡고 있고 안강(安康)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제공한다. 원래의 정자건물은 1995년 겨울에 화재로 소실하여 1997년 재건하여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없어졌다. 설천정사 빈 뜰에는 별꽃아재비만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보물411호인 무첨당(無忝堂)은 회재 이언적선생 종가의 별당으로 세운 건물이다. 상류주택의 사랑채 연장으로서 손님접대 책읽기 휴식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고 별당건축물의 수작에 속한다.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서 누마루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동편에는 전형적인 목조건축에서 볼 수 없는 지붕을 낮게 덧달아낸 구조를 하고 있었다.
무첨당 마당에서 회재선생의 종손으로서 종가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이지락선생으로부터 지금을 살아가는 종손으로서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누었다.
무첨당의 당호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事君當盡忠 遇物當至誠 願言勤夙夜 無忝爾所生
임금을 섬김에 극진한 충성을 마땅히 하고일을 임해서는 지극한 정성을 마땅히 하라.
청하여 말하느니 아침 저녁 부지런하여그대 살아가는바 욕됨이 없게 하라.]
문중과 가족의 일원으로서 후손으로서 조상의 이름에 누되지 않은 삶이기를 바람에서 지어진 무첨당( 無忝堂) “더럽힘이 없게 하라 욕됨이 없게 하라.” 조상의 이름에 누되지 않게 애써 살아온 삶이 오늘로 이어져 왔다. 이 시대의 종손은 자신은 선고(先考)의 삶을 따라가고 있는 것 뿐이라며 자신의 후대도 자신처럼 그러하기를 바라지만 강요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서글픔을 얘기했다. 종손으로서의 삶에 회의해 본 적이 없냐는 질문에 자신의 주어진 “꼴”에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했다.

심수정(心水亭)은 향단(香壇)에 딸린 정자로 함허루(涵虛樓)가 고목들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취는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건축연대는 1560년경이나 철종 때에 화재로 전소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17년경에 본래의 모습대로 중건·복원한 것이다.

서백당(書百堂)은 우재 손중돈(孫仲暾)과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태어난 곳이다. 정원에는 경상북도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건축 당시에 심은 향나무가 수령 오백년의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화단에는 백정화가 곱게 피어 있었다.
서백당 안채를 향해 들어서자 대청마루에 있는 상들이 맨 먼저 시선을 끌었다. 일년에 12번의 제사와 끊이지 않았던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지금은 가지런히 있는 저 상들은 몇 번이나 오르내려졌을까? 생각하니 종가를 이어온 것은 종손이 아니라 종부들의 수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씨 종가를 지키고 계신 이정희 종부님은 반가(班家)의 규수로서 교육받고 종부로서의 삶에 자긍심을 지니고 살아오신 어쩌면 이 시대에서는 더 이상 만나 볼 수 없는 우리시대의 마지막 종부의 초상일 것 같았다. 조근조근 얘기하시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지켜오신 가치관을 피력하시는 모습에서 삶의 구비를 인내하고 이겨낸 자만이 지닐수 있는 지혜와 여유를 볼 수 있었다. 도분(경상도말로 화)나면 당신도 막 소리도 지를 줄 아는 보통사람일 뿐이시라며 종부의 자리란 자신을 낮추고 문중의 안녕과 번성을 위해 종손을 보좌하는 것이라는 겸손함을 보이셨고 손씨문중을 대표하는 음식의 하나로 빈번한 제사에서 생기는 건어(포 종류)를 이용하여 만든 찜과 같은 알뜰함과 지혜가 묻어나는 재활용음식을 말씀해 주셨다.

향단은 전면의 한층 낮은 곳에 동서로 길게 9칸의 행랑채가 있고 그 후면에 행랑채와 병행시켜 같은 규모의 본채가 있다. 사대부가의 격식과 품격을 갖추면서 주거문화의 합리화를 꾀한 공간구성을 보이는 주택이다.
관가정의 배치는 중문이 중앙에 있으며 사랑채는 서쪽에 동쪽과 북쪽에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전체의 평면이 정사각형을 이룬 남향이며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넓은 대청 좌우에는 작은 방들이 있다. 조선 중기 남부지방의 주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종손과 종부의 얘기에서처럼 양동마을은 관람을 위한 민속마을이 아니라 지금도 삶이 영위되고 이어지고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개발과 문화보존을 핑계(?)로 더 이상 원형이 훼손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옥산서원 앞을 가로지르는 자계천(紫溪川)은 자옥산으로부터 흘러내린 계류로 주말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있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외나무다리는 튼튼하게 교체되어 있었다. 서원대청마루에 앉아서 앞 건물의 지붕과 추녀사이로 보이는 자옥산의 풍광은 눈을 시원하게 했다.

독락당(獨樂堂)에서 종가를 지키고 있는 이해철 선생으로부터 회재선생의 생애와 남기신 족적들을 전해 듣고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 공간들과 선생과 관련된 문집등을 보관한 기념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언제나 독락당에 오면 내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있다. 독락당 옆쪽 담장 일부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독락당에 앉아 문을 열면 자계천(紫溪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소쇄원의 담장 아래로 물이 흐르는 한 것처럼 자연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계정(溪亭)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자연이 정자 안으로 들어오고 때로는 정자가 자연의 부분이 되어 정자와 계곡을 따로 나눌 수 없게 만든다.

내 조상의 시원(始原)인 정혜사지에서 홀로 남아 질곡의 세월을 견디며 옛일들을 담고서 묵묵히 서 있는 정혜사지13층 석탑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멀리는 이방인으로서 신라 선덕왕(宣德王)원년(元年-당 덕종(德宗)원년)에 계림(鷄林)땅 자옥산(紫玉山) 아래에 터를 잡으셨던 송계공(松溪公) 우(宇)자 경(經)자 할아버지와 가까이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며 동지며 좋은 친구셨던 내 아버지까지.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형제들.
앞으로도 계속되는 시간들 속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던 것처럼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삶”들은 계속될 것이다.

뒷풀이 자리에서 멍석을 깔아 주신 이사장님과 진흥원 살림꾼들 깔아 놓은 멍석위에서 신명나게 놀 수 있도록 길잡이 해 주신 이영돈선생과 한바탕 신바람나는 하루를 보낸 모두가 모여 오늘 우리의 흔적들 하나하나가 이사장님 말씀처럼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일에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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