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08-25 00:00
고구려 기병을 만나다 (고구려 유적/ 백두산 야생화 답사 기행)
 글쓴이 : 이 상호
조회 : 12,114   추천 : 259   비추천 : 0  

「 수천 무리의 기병들이 벌판 저 멀리에서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다.
언덕받이에서 무리 전체가 잠시 멈추어 섰다.
汗血馬는 등에서 피같은 땀을 흘리고 있고 앞발로는 땅을 끌적거리며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면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언덕에 잠시 머문 무리들은 주위를 여기저기 잠시 살핀후 무리의 우두머리가 方向을
가리키자 마자 모두들 허리를 숙이면서 발 뒷꿈치로 박차를 가하여 말을 쏜살같이 내
몰았다.
아마 전쟁이 있는 것인지?
먼지만 남기고 황급히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들이 내 앞에 왔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한체 그들은 내앞을 그렇게 순식간에 마치
바람처럼 휙 지나가 버렸다.
엄청난 氣運이 주위를 휘몰아쳤다가 지나가는 느낌이다.

내가 集安의 丸都山城을 갔을때 나는 그렇게 高句麗 騎馬兵을 만났다.
1600년전 그들의 거친 숨결을 직접 느꼈다.
얼굴이 까맣게 탄 그들의 野生的인 눈빛은 긴장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당당했고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그들의 모습앞에 나는 숨이 막혀 죽는줄 알았다.

그들이 만주 벌판을 지배한 바로 高句麗 騎馬兵이다.
그들이 수당의 대군을 물리친 바로 高句麗軍이다.
수당의 국민들이나 군인들에게 고구려라는 소리만 들어도 恐高(句麗)症을 안겨준
장본인 들이다.

그렇게 나는 한무리의 高句麗 騎馬兵을 만났다.
여행이 끝난 지금도 나는 그렇게 만난 그들을 결코 잊을수 없다.」


“고구려 유적/ 백두산 야생화 답사” 때의 흥분된 마음을 주져 앉히고 다시 일상속으로
되돌아 왔지만 지금도 그 여운이 남아 있는 듯 어리벙합니다.

모두들 안녕 하시겠지요 .
같이 가신 모든 분들께 안부를 여쭈고 너무 좋은 시간이었기에 추억을 같이 하고자 합니다.
같이한 여러분께 여행이 너무 즐거웠고 여러모로 고마웠다고 전해드립니다 .
이번 “고구려 유적/ 백두산 야생화 답사”를 준비하고 추진하신 모든 분들께 진정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금번 고구려 유적답사/백두산 야생화 답사 중에서도 저는 “고구려 유적 답사”에 대해
보고 느낀점을 주로 소개하고자 한다.


× × ×


※ 集安에서 옛 고구려 기병을 만나다. 04년 8월 21일
고구려 유적/백두산 야생화를 답사하고

신라문화 진흥원에서 계획한 금년 8월의 유적답사 코스인 “고구려 유적 / 백두산야생화
답사” 에 우리가족 모두 참가하겠다고 신청을 했는지라 우리집 아이들은 우리가족이
함께 해외여행가는 것이 처음이기도 해서이겠지만 나와 내 아내는 요즘 中國의 東北
工程 때문에 광분하고 있던 터라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을 직접 가 본다는 것 때문에
며칠 전부터 모두들 흥분하고 있었다.

8/13일 아침 일찍 大邱를 출발해 慶州에 도착하니 다른 분들이 벌써 많이 와 계셨다.
반가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 일행은 관광버스로 慶州를 출발해서 金海국제공항에
도착하니 공항으로 직접 오신 일행들이 우리와 합류하면서 여행사 직원들이 출국준비에
분주해졌다.
티켓팅을 하고 많은 짐을 붙이고 중국 여행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난후 각자 출국
수속을 마치고 중국 남방항공기에 올랐다.

그때 부터 “고구려 유적/ 백두산 야생화” 답사 길에 오른것이다.
金海를 출발해서 비행기로 약 1시간 50분 후에 瀋陽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는 중국
현지 관광버스에 옮겨타고 첫 관광지인 淸朝의 고궁과 소릉으로 이동중에 조선족 현지
가이드에게 심양에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동북에서 가장 큰 도시 인구가 약 450만 요뇽성의 省都 13세기 몽고족(원나라) 지배
때에는 선양이라고 했고 17세기 만주족(청나라) 누루하치가 도읍(盛京)으로 정함 수도
를 북경으로 천도후 奉天이라 부르게 됨 . 등 등

나의 중국의 첫 인상은 “중국의 최근 발전에 놀랬지만 무언가 모르게 어수선하다”이다.
경제 발전이 한창중이긴 하지만 무언가 모르게 활기차 보이지 않으며 새로운 것 과
낡은 것 건물/ 집/ 도로/ 교통시설/ 인프라 시설 등 전반적으로 잘 짜여져 있지 않는듯
대부분 어수선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식당이나 관광지에서 만난 사람들도 모습들도 그렇게 밝지
못하고 언행에서도 세련미가 덜한 듯 했다. 그건 내 혼자의 생각 과 느낌일까 !

어쨓던 우리 일행은 첫 관광지인 명청조의 古宮과 청조의 北陵(昭陵)을 살펴보았다.
漢族의 文化는 아니지만 中國 文化를 직접 접해 본 것이 나에겐 이번이 처음이라 문화
자체가 많이 다르고 새롭다는 것을 느끼면서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그 나름의 아름다움
에 새삼 놀라면서도 여기에 있던 위정자들이 우리 선조들을 얼마나 괴로협을까 하는
서글픈 마음도 가져본다 .
책의 사진으로 보았던 유적들을 직접 보게되니 정말 중국 여행이 실감이 나는 듯 했다.



심양 지방의 中國 文化를 둘러본후 정말 보고 싶었던 高句麗 遺蹟을 보기위해 우리
일행은 약 7시간을 버스를 이용하여 高句麗 옛 도읍이었던 集安으로 이동했다.


나는 集安에서 옛 고구려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의 숨결을 가슴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이동하는 길은 산길에 비포장길이라 우리 70년대 초의 시골 풍경을 연상케 했다.
集安이 요새이 여서 인지 버스로 가는길도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다.
고구려를 치겠다고 소집된 隨나라 唐나라 군사들이 얼마나 겁에 질려 긴장하면서 이
험한 산을 넘었을까 ?

集安에 밤 늦게 도착한 우리 일행은 중국에서 첫날 밤을 맞는다.
염려했던 식사는 그런대로 입에 맞았고 호텔도 좋았다.

집안 지역은 고구려의 도읍지로서 땅이 조금 좁아 보이긴 했지만 분지로 되어있어
천예의 군사 요새임에는 틀림없었다.
동남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동으로 용산 북으로 우산 서로는 칠성산과 같이 병풍
같은 산으로 둘러 처져 있다. 게다가 환도산성은 더 없는 군사요새이다.

고구려가 이런 지형에 도읍을 정한 것으로 보아서도 중국 대륙과 치열한 전투를 위해
얼마나 대비 해왔나 하는것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물론 고구려 첫 도읍지인 오녀산성도 더없는 천예요새 였지만 . . .)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광개토대왕(중국에서는 호태왕 이라부름)의 비와 무덤(태왕릉)
장군총 고구려 오회분 5호분을 보기위해 다시 출발했다.
집안시의 풍경은 완전히 우리의 작은 시골도시의 70년도와 근대가 섞여있는 균형 잡히지
않은 어슬픈 모습이었으나 산세 자체는 정말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고구려의 옛 도읍이던 集安이 있는 吉林省은 한족이 90% 조선족이 10% 정도 살고 있다
고 하는데 고구려 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것일까?.

廣開土大王碑
집안에서 高句麗 遺蹟중 가장 먼저 접한 것이 廣開土大王碑 이다.
중국의 東北工程 때문에 얼마전 까지만 해도 관광이 금지 되어 있었던 우리 유산이다
廣開土大王碑를 처음 보고 그저 입만 딱 벌어져 말문이 막혔다.
그 크기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높이가 6.39m 무게가 무려 20톤이나 되는 오녀봉에서
채석된 칠요석 냉혈암의 자연석으로 만들어 진 碑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오래된 비석이
다.


비문의 글자수는 총 1775자이나 1590자만 해독이 가능하다니 아쉽고 비문의 서법은
서법의 자료로서도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된다.

더구나 일제시대 일본 군부에서 비문을 훼손하면서 내용을 왜곡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
이 비를 일본으로 가지고 갈려고 했다니 후손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또 최근 일본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중국역사관에 배치하여 중국역사로 소개한 적도 있었
다니 무언가 잘못 된 것 같아 우리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 된다.

廣開土大王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아들 長壽王이 선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세운 碑는
그렇게 모진 눈보라 비바람과 인간들의 잘못을 이겨가며 그 터에 1600년을 지켜왔다.
廣開土大王碑 를 보면서 고구려의 氣像을 느낄수 있는 부분이다.
朱夢이 天帝의 아들로서로 시작되는 비문의 내용 또한 그러하다.
광개토대왕을 만나는듯 위압감을 느낀다.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단명 하다니 . . .

그러나 중국정부가 비석에 누각을 세우고 好太王碑라고 새긴 현판이 영 마음에 개운치
않았다.


廣開土大王陵
廣開土大王의 碑에서 약 200m 떨어져 廣開土大王의 王陵이 있다.
외관상 너무 허술하게 관리 되어 있는것에 대해 속상한 마음이 금할수 없다.
광개토대왕 과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將軍塚은 이집트 와 마야문명의 피라미트와
버금가는 동양의 피라미트라 불리어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석조 무덤이다.
광개토대왕 이나 장군총은 무덤 내부가 공개 되지만 벽화는 없다.

將軍塚
將軍塚은 광개토대왕 릉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0m 정도 떨어져 선친의 비석과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무덤의 전체 규모로는 광개토대왕 릉에 비해 작지만 석조 무덤으로는 아주 뛰어난 무덤
이다.
기단이 32m 7층 사다리꼴 높이가 12.4m 호석이 각 변마다 3개씩 12개가 있다.
사용된 돌의 크기가 가장 큰 것(무덤의 상판)이 무려 50톤이나 된다고 하니 그 돌의 크기
를 알만하다.

저녁 늦게 통화로 이동 중 오녀봉을 지나치면서 가보지 못했지만 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 23Km 나 떨어져 있는 오녀봉 채석장에서 돌을 깨어 겨울철 강물이 얼면 강물의
얼음판을 이용해 무덤으로 옮겨 왔다니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오회분 5호분
다시 광개토대왕릉 뒤편에 있는 고구려 고분중의 하나인 오회분 5호분으로 갔다.
집안 지방에 고구려의 고분이 약 11000기 정도가 있으며 그중 산성에 있는 고분이
약 5000기 정도 된다고 한다.
5개 고분은 모두 우수한 내부 벽화를 가지고 있지만 4 5호 고분만 개발이 되었으나
그나마 개방을 하지 않아 볼수 없었는게 너무 아쉬웠다.
오회분 5호분은 광개토대왕릉 장군총 과 달리 봉토 석실묘로서 6세기초에 만들어진
고구려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 된다.

특히 우리가 책에서 보았던 5호 고분의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힘찬 기백은 고구려인
의 기상을 느낄수 있는 것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아쉬움으로 남는다.

集安 博物館
집안 박물관에서 집안 지방에서 발굴된 고구려 시대의 각종 유물들을 둘러보고 내가
찾고 싶었던 고구려의 수막새 암막새를 보았다.
역시 책에서 보던 문양들이다. … 참고 “신라의 와당” . 김 유식 전문위원 著
너무나 갖고 싶은 막새들이다.


丸都 山城
고구려는 주로 산성을 많이 쌓아 나라 전체를 수호 했다.
고구려가 쌓은 산성만 하더라도 약 160여 성이 있었다고 하니 국가 안위와 국민의 안녕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
國內城이 평지인 대신 이 丸都 山城은 말 그대로 산성이다.
유사시 國內城에서 이 丸都 山城성으로 피난처로 활용 했지만 임시 수도이기도 하다.
丸都 山城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앞에는 냇가가 흐르고 뒤에서 완전히 산으로
둘러 쌓인 천연의 요새로서 성 내에 우물도 있고 성문 2개소 와 성벽 그리고 궁궐터도
남아있다.
역시 이 자리도 중국의 주민들의 집들이 지어져 그 흔적을 고스라니 알수는 없었다.

丸都 山城의 고구려 고분
나는 고구려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성을 쌓으면서 흘리는 땀의 채취와 돌을 깨는
징의 소리를 느낄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은 산성의 흔적과 고분만의 그 흔적들만 남긴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그 당시 그들의 말 발굽 소리를 느낀다.
나는 그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國內城
國內城이 현재 집안시의 평지에 있었던 터라 그 흔적은 아주 일부만 남겨지고 모두 훼손
된 채로 국내성의 옛터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텔레비젼에서 간혹 고구려 유적 다큐멘트리를 방송할 때 간간히 비추어 주는 그 모습이
었다.

집안 지방의 고구려 유적을 직접 보는 흥분과 함께 중국에 위치 하고있는 것과 훼손된
채 귀중한 우리 유산들이 너무 오래 방치 되어 있었던것에 후손으로서 너무나 안타까
울 뿐이다 .


× × ×


요즘 중국의 東北工程이니 뭐니 하여 현재 중국 영내에 있는 고구려의 옛 땅 과 유적
뿐만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高句麗 歷史 마저도 지네들 역사로 조작 주장할려는
이때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고 모두들 歷史 意識을 새롭게 해야 겠다는 마음을
다져 본다.

역사를 배앗긴 부끄러운 後孫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우린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패자는 말이 없다.

마지막 살아 남는자가 이기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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