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06-15 00:00
햇살 눈부시던 여름날(김해.창원답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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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를 쓸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선생님이 내 주신 숙제를 다른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안 해왔고 나만 해왔을 때의 난감한 느낌. 어떻게 해야할까? ]

수로왕릉
하늘은 눈부시게 맑고 햇살은 강렬하게 내리 쬐어 세상 모든 물상들을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하루 잘 단장된 수로왕릉을 보면서 역사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역사는 후대에서 평가받는다고 하지만 역사 어디에도 약자와 패배한 자의 역사는 남아있지 않다. 이긴 자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기록으로 역사는 이어져 오고 있다.
이도재 선생님(김해문화원 이사)과 김호상 선생님의 설명에서와 같이 삼국의 역사는 가야의 역사를 포함한 사국의 역사로 재조명되어야 함이 마땅하지만 역사적으로 증빙이 가능한 가야의 역사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를 평가할 후대는 증언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가까운 시대여야 하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가야는 독립되어 존재된 국가가 아닌 다만 신라에 흡수되어 잊혀진 신라역사의 일부였을 뿐 이였다.
1970년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김해지역 발굴의 경우 30여년 간의 유적조사와 연구성과를 통하여 한반도의 고대사와 가야사를 규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 때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명명했던 것처럼 증빙될 수 없는 사료가 후손들에 의하여 자의적인 역사해석으로 그릇된 진실을 만드는 우를 범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했다.
잊혀진 역사를 되살려내고자 하는 노력은 그 의욕이 너무 앞서다 보면 때로는 과함이 아니함만 못하다(過猶不及)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물의 전시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대성동고분전시관의 노출전시관과 고분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문자로 기록되어지지 않았던 시대의 역사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은 어느 정도일까? 하는 반성을 하게 했다. 역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과학적 장치를 사용한 점 이 눈길을 끌었다.
때로는 용어의 우리말화가 말 뜻 자체의 이해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골각기(骨角器) 장신구(裝身具)라는 표현이 한글과 한자를 병용해 배운 세대에게는 뼈연장이나 꾸미개보다는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국립김해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하여 전시실로 향하는 긴 회랑을 걸으면서 건물의 효용성에 대한 생각을 했다. 관람자의 동선을 입구에서 바로 전시실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회랑을 통하여 건물의 외관과 야외전시물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박물관 내부로의 진입을 유도하는 것은 경제성이 큰 의미요소로 부각되지 않은 박물관 건물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철의 왕국인 가야를 상징하는 검은 벽돌로 된 외장이 주는 느낌과 외부에서 보는 건물의 규모에 비하여 전시실과 전시품은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봉황대에서 김호상선생님은 고대역사와 인류의 진화과정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다. 강건형 오스트랄로피테쿠군이 더 이상 진화를 하지 못하고 멸종하였고 이에 반하여 연약형 오스트랄로피테쿠군이 진화하여 오늘날의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설명에 박물관에서 유물들을 보면서 느꼈던 의구심에 나름의 해답을 만들어 냈다.
철의 제련기술로 그 시대의 다른 부족국가보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앞서갔던 가야가 왜? 신라에 멸망했을까 하는 의문에 그들은 농경사회로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철의 생산 가능등으로 자족하고 안주하지 않았을까 하는.
척박한 조건을 가진 까닭에 살아남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신라에 합병되었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추측.

창원성산패총의 유물관은 김해의 박물관들과 대조적으로 예산의 혜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발전이 최고의 덕목이 되는 시대에 공단 한가운데 이런 공간을 남겨두었다는 것 자체로만으로 높이 평가 받아야한다는 생각.

해거름에 도착한 불곡사는 불사가 한창이였다. 대웅전에서 예불중인 스님의 독경소리와 목탁소리는 대패소리에 묻혀 버렸다. 건물의 신축은 기존건물과의 조화와 어울림을 우선으로 하여야 하지만 세음루(洗音樓)는 대웅전에 안치된 석조비로자나불상의 조망권(?)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비로자나불상은 세속의 잡다한 일상들과는 무관하게 밝은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불곡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잘 다듬어진 석재가 아니라 자연석 그대로의 판석을 사용한 비석 하나였다.

햇살 따가운 여름하루 흘린 땀만큼이나 몸은 지쳐 있었지만 옛 조상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의미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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