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9-01 00:00
시간의 흔적(경주시내지구답사)
 글쓴이 : 백태순
조회 : 12,524   추천 : 317   비추천 : 0  

유난히도 더운 여름을 맞고 있는 그 한가운데의 하루
차라리 한 줄기 굵은 여름비라도 내리기를 기원했으나 하늘은 얄미우리만큼 맑고 햇살이 피해가고 싶은 삶의 고비처럼 내려쬐이는 가운데도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였다.

개나리와 수양버들로 봄이 왔음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곳 오릉.
친구들과 하루 종일 그 숲에서 책보고 음악을 들으며 보내던 정겨운 곳이건만 햇살아래서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늘로만 숨어들게 된다.
시간의 흔적인 듯 소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모습을 드러내고 햇살아래의 능의 곡선들과 어우러져 천년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신라의 시조왕릉始祖王陵으로 전하는 오릉五陵은 4基는 원형분圓形墳이나 1기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되어 있다. 표형쌍분은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五陵의 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오릉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는 오릉을 사릉蛇陵이라 했는데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남해왕南解王·유리왕儒理王·파사왕破娑王 등 박씨 사왕朴氏 四王을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혁거세왕과 알영부인閼英夫人을 합장하려 하자 뱀의 이변이 있어 각각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는데 혁거세왕이 재위 62년만에 승천하였다가 그 후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냈으므로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하며 담암사曇巖寺 북릉北陵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
그러나 현재의 오릉은 김호상선생의 설명처럼 이와 같은 대형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후세後世 수축이었으면 몰라도 혁거세왕당시의 고분 형식은 아니다.
신라 왕릉에 대한 진위여부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문제 제기가 되었다. 조선 영조英祖 때 화계花溪 유의건柳宜健은 화계집花溪集에서 1730년 이후에 17기의 왕릉이 추가로 지정된 것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이근직 2000 ꡔ慶北史學ꡕ23집(문경현교수정년퇴임기념논총) 경북사학회]에 나와 있다.
오릉 한켠에는 혁거세왕의 왕비인 알영왕비의 탄생지로 알려진 알영정閼英井 터가 있다.

오릉에서 길을 건너면 삼효각三孝閣비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자주 지나는 길임에도 처음 보는 것이어서 무관심과 관심의 차이를 느끼게 했다.
삼효각은 조선조 중종 때의 경주 김씨 문중의 응벽應壁 응규應奎 응정應井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을 기념하여 왕명으로 건립한 비각이다. 3년간 시묘살이를 했으며 상복을 벗고도 호의호식을 하지 아니하고 사당 뵙기를 종신토록 하였기에 왕이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한다.
삼효각 담장의 기와에는 와송이 자라나고 이끼들은 여름 더위에 푸름을 잃고 마른 모습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화석(꽃돌)의 무늬처럼.

삼국유사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기에는 그곳에 17만 8936호의 집이 있고 이 가운데 35채는 금입택金入宅[부유층의 대저택]이라 하여 이를 열거하였는데 여기에 재매정댁이 포함되어 있다. 현존하는 재매정財買井은 그 재매정댁의 유허로 추정되는데 금입택에 어울리는 비교적 큰 우물이 남아 있고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 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재매정은 우물의 깊이가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 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사용하지 않은 우물물은 탁하게 흐려져 있고 덮개 사이로 하늘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재매정에서 향교로 향하는 길목에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된 사마소가 위치하고 있다. 사마소는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조직하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협의기구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741년(영조 17)에 다시 짓고 풍영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동쪽으로 300m 떨어진 월정교지月精橋址의 북쪽 교대橋臺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1984년 경주 월성사적지(사적 16)를 정비하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사마소는 설립 초기에는 각 고을의 교화와 지방행정에 기여하였으나 점차 노골적인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문제가 생기자 1603년(선조 36) 유성룡의 건의로 폐지되었다.

최씨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7호로 1700년경에 건립된 것이라 하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원래 이 집터는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있던 터라고 전해진다. 설총이 태어난 집인 것이다. 이 집터에서 풍수상 중요한 핵심은 안산案山(집앞에 보이는 산)이다. 이중안산二重案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말발굽형의 디귿자 형태의 도당산 뒤에 경주 남산의 세 봉우리가 겹쳐져서 보인다.
1970년 11월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가 최근 복원되어 있었다.

최 부자집의 철학 가운데 특이한 것은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라/이다. 진사는 초시 합격자의 신분이다. 이를테면 양반신분증의 획득인 셈이다. 벼슬이 높을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은 높아지고 한번 휘말리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벼슬의 끝인 권력의 종착점이 어디인가를 꿰뚫어 본 데서 나온 통찰력의 산물이다.

/흉년에 땅을 사지 않는다/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등 이렇게 지켜온 철학들이 9대 진사에 12대 만석꾼 살림을 유지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철학들은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한 여름에 들린 답사객들에게 안채 마루를 내어주었고 손 매무새며 살림 야무진 명문가의 안주인들에 의해 모시옷들은 곱게 풀 먹여져 빨래 줄에 걸려 있었다.

경주향교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1호로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향교로 신라시대인 682년(신문왕2) 국학國學이 설치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鄕學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온 유서 깊은 곳이다.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전사청 내신문 등이 남아 있다.
현재의 건물배치는 조선 성종 23년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최응현崔應賢이 성균관의 건물배치를 그대로 본따 다시 지을 때의 배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성균관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4곳(성균관 경주 나주 전주향교) 뿐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건물배치를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 유교건축의 교과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향교가 임진왜란에 전소된 것을 선조 33년(1600)에 기공하여 선조 35년(1602)에 새로이 완공된 대성전의 [도리이상 해체보수공사(2000년 6월)] 때에 발견된 종도리에 묵서로 씌어진 중건 상량문은 상당한 사료적인 가치가 있다.
마침 길일인지 명륜당에는 초례청이 설치되어 있었고 전통 혼례의식을 위하여 닭이 보자기에 싸여 들어오고 한편에서는 신부와 신랑이 혼례의상을 입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부에게 축하의 인사와 덕담을 건네고 고운 모습을 한 장 담아 보았다.
그런데 아직도 의문이 가는 것이 있다. 명륜당의 현판에는 新安朱熹書라고 낙관되어 있었다. 주희 선생이 직접 쓴 글씨가 아닐진데 왜 저리 쓰여 있을까? 자료에는 제주향교에도 그리 되어 있다고 한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어서 참 궁금했다.

일정교 · 월정교는 삼국사기경덕왕조에 /경덕왕 19년 2월 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월정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서 전하는 교량으로 판단되고 있다.
월정교는 남 북편 교대와 4개소의 주형교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樓閣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월정교 교각 근처에는 여름을 즐기는 몇 분이서 천렵을 하고 있었다.
답사 일정을 미루고 맑은 남천 물에 첨벙 첨벙 발 담구며 그 분들의 여름나기에 끼어들고 싶어졌다.
일정교와 월정교가 신라왕경의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음에 진행되고 있는 복원계획이 좀 더 타당성 있고 면밀하게 검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보게 된다.

대릉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유적지 중의 하나이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딴 것이다. 미추왕릉은 죽현릉竹現陵·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하는데이 능에서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나와 외적침입을 막았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 대릉원 내에 있으며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여겨진다
대릉원에 들어서자 여름 한낮 더위는 그 절정을 향하여 치닫고 그래도 모두들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천마총은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이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하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천마총의 입구에는 /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합시다/라는 내용을 돌에 새겨 걸어 두었으나 천마총 내부에는 밖의 더위를 피하여 모여든 관광객들로 붐비고 영어/일어/중국어/우리말이 뒤섞여 마치 바벨탑 아래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제 이야기만 고래고래 하고 있는 듯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첨성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16년(서기 647년)에 건립된 천문대라는 것이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첨성대에 대한 상식이다.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에 의하면 첨성대가 제천의식 지내던 제단이었을 수 있다는 설에 첨성대를 다시 한번 면밀하게 보게 한다.
신복룡교수의 이야기에 의하면
첨성대의 문이 남쪽으로 향한 것은 제주祭主와 부락민들이 북쪽을 향해 제사를 드렸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북쪽의 북두칠성을 향해 제사를 드렸으며 그 때문에 첨성대瞻星臺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며 북두칠성은 영원과 장생長生을 기원하는 노장老莊 사상의 상징이었으며 첨성瞻星이라는 말도 /별을 관측한다/는 뜻이 아니라 /별을 우러러 본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별을 우러러 보았지 꿰뚫어 본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첨성대 맨 위에 있는 우물 정井은 비를 기원하는 기우祈雨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관개가 발달하지 않고 천수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농경 사회인 신라로서는 기우제야말로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신복룡교수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역사학이란 결국 풀이解釋의 학문이다. 따라서 이 풀이가 잘못되면 역사는 그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첨성대가 별을 신앙적으로 우러러보던 곳이었는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관측하던 곳이었는가의 해석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정신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과학사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그들의 결론은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계림으로 향하는 길 양편에는 황금코스모스가 하오의 태양아래 눈이 아리도록 펼쳐져 있고 천마총과 월성을 오가는 마차를 끄는 말들도 더위에 지쳤는지 시원하게 등목을 하고 있고.
어릴 적 백일장과 사생대회가 열리던 추억속의 장소인 김알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이 있는 계림에는 물푸레나무 단풍나무들이 여름 한가운데서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림 한편에는 1986년에 조성된 찬기파랑가 향가비가 있었다.

咽鳴爾處米 흐느끼며 바라보매
露曉邪隱月羅理 나타난 달이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흰 구름 쫓아 간 아래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여기 시퍼런 냇가에
耆郞矣 史是史藪邪 기랑의 모습이 있도다
逸烏川理叱磧惡希 이로 냇가 조약돌에
郞也持以支如賜烏隱 랑이 지니시던
心未際叱 逐內良齊 마음의 갓을 쫒고저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아 잣가지 가지 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눈이 못 올 고깔이여

신라 시대의 화랑이었던 기파랑의 높은 인격을 사모한 충담사가 그의 인물됨을 상징성을 띤 자연물에 비겨 찬양한 노래이다. 화자의 대상에 대한 예찬의 태도를 보여주며 향가 특유의 숭고미를 자아내고 있다.

맛이 때로는 맛 그 자체보다는 어떤 공간과 어떤 시간과 또 어떤 사람들과 함께였나는 상황에 좌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름 하루를 땡볕 아래 열심히 걸어 다닌 후 그늘을 찾아서 자리 잡은 후에 알맞게 불어주는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먹는 수박과 복숭아 맛을 어디에 비길까?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아삭한 감각과 씹힘. 그리고 단맛과 청량감.

월성은 안압지 동편에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이었으며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만 남아 있다.
월성에 대한 이칭異稱으로 반월성이 보편화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최초로 반월성을 호칭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려 명종(1170∼1179)때의 학자인 김극기金克己가 월정교를 읊은 시에서이다. 이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 실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 반월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고려시대부터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연차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월성 일대 발굴 과정에서 단을 지어 연못처럼 아름답게 조성한 해자垓字가 동·서·북에 월성을 에워싸고 있었고 해자 가에서는 많은 건물터가 드러났다. 해자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월성 성곽 외부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담아놓은 축조물이다. 월성해자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석축을 쌓아 안압지처럼 조경시설로 활용됐다

석빙고는 월성의 북쪽 성벽 중간지점에 성벽을 가로질러 지어져 있다. 신라는 오래전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였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였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현재의 석빙고가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신라시대 축조설築造說 두가지 견해가 있다.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견해로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얼음을 저장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영조 당시 인적마저 외딴 이곳에 석빙고를 축조하였을 까닭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서 신라시대의 것을 개축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석빙고 좌측에 있는 비문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부윤이던 조명겸이 목조의 빙고氷庫를 석조石造의 빙고로 다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정도 옮겨 현 위치에 재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극기훈련을 방불케 하는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로 안압지에 도착했다.
안압지 복원사업이 끝나고 일반에 공개되기 전 고교시절 졸업앨범 사진을 찍던 생각이 났다.
유독 우리 반만 아직 단장이 마무리 되지 않은 안압지의 늦가을 쓸쓸함을 마지막 추억으로 담으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던 소리가 기억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시절 그 친구들은 오늘의 나처럼 이곳에 들리게 되면 그 날을 기억할까?
그때의 우리가 꿈꾸었던 시간들을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저물녘 아슴아슴한 풍경들을 마음에 한껏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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