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7-25 00:00
남겨두고 가는 설렘(강화지구 답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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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지석묘]

강화江華 가만히 입속으로 되뇌어 불러 보면 첫사랑의 아련한 울림 같은 느낌이 전해져 온다. 나름으로 머릿속으로 한껏 그려본 강화를 꿈꾸며 길을 나섰다. 지리적으로 너무 먼 곳이긴 하지만 설렘으로 들뜬 마음이 있어 마음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강화에 발을 디딘 곳은 고려궁지였다. 강화의 역사는 외세의 침입에 대항했던 선조들의 애국심의 역사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승평문昇平門은
왕궁의 정 남문으로 왕을 제외한 조정대신 이하가 문 밖에서 하마下馬하여 영입하도록 되었다고 한다. 승평문을 들어서자 오후 햇살아래 해바라기들이 세상소식에 궁금한 것이 많은지 담장 너머에서 까치발을 하고서 유수부동헌 마당을 훔쳐보고 있고 외규장각 앞뜰에는 모감주나무가 만개해 있었다. 고려궁지에는 외유장각과 강화유수부동헌江華留守府東軒과 유수부이방청이 1977년에 고려궁지와 함께 정비하여 복원되어 있었다. 유수부동헌에는 영조때 학자이자 명필이었던 백하 윤순이 쓴 명위헌明威軒이라는 관호가 걸려 있었다.
고려궁지 강화동종각에는 현재 강화역사관에 보관되어 있는 강화동종의 복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강화고인돌은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언즈에서 열린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중의 하나인 강화 지석묘(사적 제137호)를 비롯 고려산(436m)을 중심으로 반경 4km내에 고인돌이 120여기가 집중되어 있다.

강화도는 우리 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라고 한다. 강화를 둘러보면서 제일 많이 만난 풍경은 섬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는 모심기한 벼가 잘 자라고 있는 초록 들판이었다. 그러나 석모도 가는 뱃전에서 우리를 따라오는 갈매기들을 보면서 내가 강화에 그것도 섬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새우깡을 낚아채는 갈매기의 솜씨는 일품이었고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며 마냥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어른들은 동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무섭게 날아드는 갈매기의 매서운 눈매와 부리는 히치콕의 영화 /새/를 연상케 하여 한순간 더럭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외포리에서 출발한 배가 석모도 선착장에 닿자 갈매기들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바다로 돌아갔다.

보문사는 남해 보리암 향일암 낙산의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음도량이다. 보문사에서 다른 여느 사찰과 다르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윤장대輪藏臺였다. 윤장대는 경전을 봉안한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것으로 이것을 돌리기만 해도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예천 용문사에 고려시대 자엄대사가 세운 2좌가 있다. 티벳불교(라마불교)의 영향인지 최근에 새로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불전 사물인 범종(범종루)과 법고(법음루)가 다른 전각에 모셔져 있었다.
보문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나한상을 모신 보문사 석실 홍예문 앞에 있는 수령이 700년 된 향나무와 보문사가 번성할 당시 쓰던 일반 맷돌의 두배 정도나 되는 큰 맷돌이 있었다.
대웅보전 위로 아스라이 보이는 눈썹바위는 418개의 층계를 올라야만 한다.
장마 중의 습기와 더위에 땀은 닦을 틈도 주지 않고 흘러내리고...
커다란 바위 절벽에 두 눈썹같이 길게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마애석불좌상(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9호)이 있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만(卍)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곳은 비둘기들의 보금자리였다. 부처님 품안에서 부처님의 가피와 원력을 받는 비둘기들은 행복(!)할 것 같았다.
정교함이나 예술적인 미와는 동떨어진 단순한 모습인데 그것이 더 정겹게 느껴졌다. 불상 왼편에 건립에 대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석모도에서 맞는 일몰은 강화의 비경중의 하나라고 한다. 늘 그렇지만 답사 길은 시간과의 다툼에서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석모도를 벗어나는 뱃길에서 아직은 바다로 돌아가기에는 이른 해를 바라보면서 다음에 다시 찾아와야 할 명분을 남겼다.
안개로 흐릿했지만 나름의 운치를 더해주는 바다의 해질녘 풍경을 보면서 석모도가 혹 夕暮島가 아닐까? 마애관음좌상이 굽어 살피는 釋母島가 아닐까? 하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석모도는 300m에 이르는 해명산 상봉산 상주산 등 3개의 산봉우리가 마치 온상처럼 솟아있다고 해서 /자리 석席/ /온상 상床/자에 /갈 거去/자를 붙여 /털 모毛/자를 합성하여 席毛島라고 부른다고 한다.

외포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잠을 청했다.
어둠이 갈매기 울음소리도 삼켜버리고 어디서도 파도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전등사는 남문과 동문이 있다. 이 두개의 문은 모두가 사찰의 일주문과는 거리가 먼 산성의 대문이다. 삼랑성三郞城은 사적 제 130호로 성의 축조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 불리운다. 동문을 들어서자 병인양요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양헌수 승전비를 만나게 되었다. 안개 자욱한 숲속에서 단체사진을 담는 것으로 전등사 답사를 시작하였다. 숲길을 잠시 걸어가자 이곳에서도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윤장대를 만났다.

대조루 아래를 지나 정면에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졌다.
조선후기 화려한 목조건축의 미를 보여주는 대웅보전은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고 불단 위의 닫집은 처마를 정자각丁字閣 모양으로 꾸미고 16포包의 공포를 중첩해서 배열하고 그 아래에는 부룡浮龍 극락조 등을 매달아 놓았으며 법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수미단에는 용 물고기 봉황 연꽃 모란꽃등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1544년 제작된 105매에서 하나가 빠진 104매의 법화경판이 대웅전 내부에 보존되어 있었다.
정화궁주가 시주했다는 목조건축물의 화재를 대비하기 위하여 물을 담아 놓는 그릇의 일종인 드무인 청동 수조가 대웅전 왼편 벽 한켠에 놓여 있었고 대웅전 내부에 보관되어 있다던 죽은 이가 생전에 지었던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보인다는 업경대業鏡臺는 유물 도난의 우려로 인하여 어디론가 옮겨져 보이지 않았다.

대웅보전의 추녀아래 네 기둥에는 도편수의 전설이 깃든 벌 받는 나부상裸婦像이 조각되어 있다. 비슷한 크기와 흡사한 표정이지만 어떤 나상은 양쪽 팔 모두를 머리 위로 올려 보를 떠받들고 있고 어떤 나상은 한 손으로는 무릎을 짚은 채 한 손으로만 지붕을 떠받들고 있고 네 곳 중 다른 세 곳은 두 손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반해 한 곳은 한손을 내리고 있었다. 마치 벌을 받다가 잠시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어서 나부상을 만든 목수의 재치와 익살을 느끼게 한다. 발가벗은 몸에 빨간 띠 하나 두른 멀뚱한 표정에서 나부상들은 마치 대웅전 네 귀퉁이에서 업보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듯 보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 자신의 일상이 지붕의 무게만큼이나 쌓은 번뇌로 허덕거리고 있는 듯 느껴졌다.
나부상이 도편수의 사랑을 배신하고 도망친 주막집의 여인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고려왕실을 차지하고 오만방자했던 제국공주를 징벌하기 위해 깎아 놓은 조각은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 팔만대장경을 주조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원나라를 물리치려 했던 고려 사람들의 간절했던 마음이 전등사의 벌 받는 나부상으로 전해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나는 왠지 애국충정을 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고려사람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대웅전에는 전면 편액은 작자미상이며 네 기둥에 주련柱聯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의 글씨이다.
주련이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로 기둥柱에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편시방중 부처님께서는 시방세계 어느곳에나 두루 존재하시는도다.
月印千江一切同월인천강일체동 많은 강물천강 속에 비친 각각의 달이 기실 그 실체는 하나듯이
四智圓明諸聖本사지원명제성본 온갖 지혜 두루 밝으신 모든 현성賢聖의 그 본분이 부처님이시니
賁臨法會利群生분임법회이군생 이 법당에 들르는 불자들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생애에 이로움이 있을 진저

강설당에는 조선말기의 화가이자 서예가였던 해강 김규진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백양사에도 죽농 안순환의 그림으로 해강이 쓴 이와 유사한 양식의 현판이 있다.

이외에도 해강의 작품으로 개심사 안양루의 편액 가야산 해인사의 현판 및 통도사의 주련과 인천 영종도 용궁사 관음전 주련등이 있다.

보물 제 179호인 약사전의 내부도 대웅보전만큼 화려한 조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등사 범종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중국의 종임에도 불구하고 보물(보물 제 3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164cm 밑 지름이 100cm인 이 종은 중국 송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향로전香爐殿과 극락전 명부전 앞에는 수국이 곱게 피어 있어나고 대웅전 앞마당의 오른쪽에는 400년이 된 느티나무가 서 있고 전통찻집인 다래헌 마당에는 금꿩의다리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보호수인 은행나무 가지에는 일엽초가 빼꼭히 맑은 연두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전등사도 보문사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둘러보아도 탑이 보이지 않았다. 현존하는 한국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전등사에서 탑이 조성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양질의 석재 등 자재의 수급이 어려웠던 섬이라는 지리적인 이유로 때문일까?
탑을 대신할 어떤 다른 것이 있었던가?
이런 저런 이유를 한참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내 능력 안에서는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마니산이 그만큼 정결하며 장엄하고 뛰어난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강화는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로 되어 있고 문물이 발달하였으며 마니摩利·혈구穴口 등 하늘과의 인연이 깊다고 예로부터 알려져 왔다. 강화도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신화가 숨쉬고 있고 개성과 한양의 관문으로 수도방위의 전초기지였고 서구열강이 침탈해오던 때는 참혹한 국난의 현장이었다. 참성단을 오르는 숲길은 적당히 그늘지고 상큼하고 서늘한 공기와 나무들이 뿜어내는 초록내음이 가득하여 마음 편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숲길이 끝나고 끝없어 보이는 계단과 마주치자 계속 올라가야 할 것인가 하는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저리 험하고 어려운 길을 뉴스시간에 나오는 성화를 채화하는 날개옷(?)을 입은 이들은 어찌 올라갔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 ^
결국 오던 길은 다시 내려와 큰나무 아래에 마련된 너른 평상에 앉아 여름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올라갔던 사람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봄날 아슴아슴 피어나는 하얗고 조금만 탱자꽃과 가을날 파란 하늘 아래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울타리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강화 사기리에서 만난 수령이 400년 이상된 천연기념물 제79호 탱자나무는 그런 내 생각이 틀린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이 나무는 탱자나무가 자라날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 강화도임을 알려주고 있다 한다.

초지진은 강화남단의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된 돈대중의 하나이다. 모두 허물어져 돈墩터와 성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대墩臺란 사면을 절토切土하거나 성토盛土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擁壁으로 받친 부분을 말하며 건물을 짓거나 분수·연못·화목花木 등이 조성되는 경우와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추어 방위시설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곳이 신미양요의 최대격전지였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21세기식의 전쟁개념을 가진 꼬마친구들은 여기서 무슨 전쟁을 할 수 있느냐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과 돈대 옆의 소나무에는 당시의 전투를 말해 주는 포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강화역사관은 석기시대 유물에서부터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항일운동까지의 강화도 및 인천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34 전시실에 전시된 강화의 역사는 몽고침입에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의 북방민족의 침략사와 병인양요에서부터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한일합방 1919년 3.1운동까지의 과정까지 우리 민족의 항쟁과 수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강화동종은 정상이 반구형이며 그 중앙에 용뉴가 붙었는데 용뉴의 형태는 유자(U子)를 엎어놓은 모양에 용두가 붙은 쌍룡이다. 따라서 용통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주조된 명문에 의하면 주조 년대는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 종의 양식에서 퇴화하면서 조선시대 종의 특색을 뚜렸하게 보여 주고 있다. 1995년부터는 종신에 금이 가서 타종치 못하고 보관하고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19년(1232)부터 원종11년(1270)까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고와의 줄기찬 항쟁을 벌일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강화역사관 마당에서 돈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천연기념물 제78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돈대 안에는 조선시대의 대포인 불랑기 소포 홍이포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몽고와 외교교섭을 벌였던 이섭정利涉亭에는 강화도를 감상할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흐린 하늘과 바다와 정박해 있는 몇 척의 배가 이곳이 예전의 군사적 요새임을 무색하게 평온하기만 했다.

강화 역사관 야외에는 총 67기의 강화비석군이 있는데 조선시대 때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군수 등의 영세불망비와 선정비 그리고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등이다.
늘 이런 비석들을 볼 때마다 그런 의문이 들곤 한다.. 저들 중 과연 몇이 정말로 선정을 베풀었을까? 진정한 목민관이였다면 저런 선정비를 만들게 했을까? 하는.

강화는 기대만큼의 수확도 있고 아쉬움도 많이 남기게 한다.
언젠가 다시 들르게 되면 단군할아버지의 영령이 깃든 참성단도 오르고
시간 때문에 놓친 석모도의 일몰도 맘껏 즐기고
정수사의 아름다운 대웅전도 살펴보리라 생각한다.
남겨두고 가는 것이 있어서
앞으로 봐야 할 것들이 많아서
늘 기대와 설렘이 있어서 즐거운 시간들이다..

덧붙임
숙제는 늘 제때에 해야 하는 것인가 봅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미루다 보니 자꾸 미루게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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