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6-15 00:00
마음으로 느끼는 매향梅香(산청지구답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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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山天齋 앞 뜰의 남명매南冥梅]

1997년 여름의 한가운데 지상의 모든 것들을 다 메마르게 할 듯이 작렬하는 태양 아래 눈이 부실 듯 반사되는
검은 돌무더기를 처음 만났을 때 그만 그 자리에서 한순간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하나의 왕릉이 아니라 신과의 소통을 위한 거대한 제단인 듯 그 신성한 느낌에 사로잡혀 버렸었다.
하늘을 향한 제사장의 간절하고 정성이 깃든 제문과 기원들이 어디선가 들릴 듯 했다.
다시 구형왕릉을 찾은 오늘도 그날처럼 그리 강렬하지는 않지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 구형왕릉[專 仇衡王陵]은 피라미드형 왕릉으로서는 국내 유일한 돌무덤이다.
산청답사는 왕산(923m)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구형왕릉을 만나는 일로 시작하였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재위 521~532)인 구형왕이 532년 신라에 항복하면서 492년간 지속되었던 금관가야는 역사의 무대서 사라진다. 항복한 대가로 후손들은 신라 진골로 편입되고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바로 구형왕의 증손자다.
구형왕릉 진입로에는 사대비射臺碑가 있었다. 이곳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김유신이 청년시절에 이곳에 와서 증조부릉의 시릉살이를 하면서 무예를 익혔으며 사대비는 그 때 활 쏘던 자리를 표시 한 것이라고 한다. 지리산이 신라 화랑들의 심신을 수련하는 곳 이였고 김유신이 이곳에 와서 수련하였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반드시 이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구형왕릉 주변에는 신성한 기운이 도는 장소인 듯 여기저기 수련하는 사람들의 모습들도 보였다. 엉겅퀴 백선 꿀풀 등 들꽃이 척박한 돌무더기사이로 피어나고 있었고 그 여름날 닭의장풀이 다투어 피어나던 길가에는 때죽나무 꽃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대원사를 향하는 길은 자동차로 한달음에 오를 수도 있으나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가지들이 들려주는 고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허위단심 오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유홍준님이 대원사계곡을 일컬어 남한 제일의 탁족처濯足處로 꼽으면서 /너럭바위에 앉아 계류에 발을 담그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먼데 하늘을 쳐다보며 인생의 긴 여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보다 더한 행복이 있으랴/고 했던 말에 새삼 공감하며 그 행복감을 맛보고 싶었으나 빠듯한 일정에 눈으로 마음으로만 즐기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대원사 계곡은 골짜기가 깊다 보니 변환기 때마다 중요 피난처이자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1862년 2월 산청군 단성면에서 시작해 진주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한 농민항쟁에서부터 동학혁명에 이르기까지 변혁에 실패한 사람들끼리 모여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며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곳이며 일제시대에는 항일의병의 은신처가 되었다.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토벌을 하기 위해 골짜기에 들어갔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빨치산이 되었건 골짜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살아서는 못나왔기에 대원사 계곡에서 유래한 /죽었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골(골짜기 계곡)로 갔다/라는 말 역시 골짜기의 깊음과 골짜기에 들어갔다 하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었던 현대사의 단면을 느낄 수 있다.

보물 제1112호인 대원사다층석탑은 선방인 사리전에 위치하고 있어서 결제기간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먼 길 찾아간 이들에게 온전한 모습을 보여줘도 좋으련만 담 너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석탑은 돌 속에 철분이 산화되어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는 무엇일까? 불법佛法은 각자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것이라 하거늘 탑을 보러온 중생들이 뭐에 그리 바른 깨달음에 방해가 될까 마는 원칙은 원칙대로 지켜져야 하기에 해제기간동안에 다시 들려 상층기단 각 면에 1구씩의 조각된 합장공양좌상合掌供養坐像과 네 귀퉁이에는 우주 대신 원각한 1구씩의 인물입상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이 있기를 마음으로 기원했다.
원통보전에서는 가사장삼을 입은 스님의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흘러나오고 대웅전 부처님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아이를 자비로운 미소로 지켜보고 계시고..
대원사는 평화롭고 고요했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산청의 내원사는 절집 앞으로 흐르는 장당골 계류와 나무들의 어우러짐이 아름다워 잘 가꾸어진 정원 같아 보는 이의 마음까지 시원하고 평안하게 하고 그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기는 이들의 모습이 계곡 여기저기에 보였다.

내원사 대웅전 앞에는 보물 1113호인 삼층석탑은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서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에 타서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옥개석이 많이 부서지고 상륜부는 아예 달아나고 없는 등 층층마다 훼손이 심한 편이어서 쳐다보기에도 딱할 만큼 파손된 부분이 많았다. 탑을 지켜주는 키큰나무가 있고 탑 주변의 꽃들이 피고 지고 있어 그렇게 주변과 어우러져 자연스런 모습으로 천년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석남암수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南巖藪石造毘盧舍那佛坐像은 보물 제1021호로 내원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었다. 조성된 연대는 국보 제233호로 영태2년 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가 이 불상의 복장물伏藏物로 확정됨에 따라 알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비로자나불 가운데 그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고대 불교사와 조각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불상은 높이 약 1m 대좌 높이 63㎝의 크기로 화강암에 조각되어 있고 풍우와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오는 과정에서 마멸이 심하여 세부표현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매화가 피는 철이면 다투어 매화기행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 아름다운 토종 고매古梅로는 최고 최대로 꼽히는 선암사 선암매를 비롯하여 화엄사 흑매 소쇄원 백매와 식영정 홍매 등이 있다.
산청에는 산청삼매라 하여 남명매 정당매 분양매(원정매)가 있고 이밖에 한국 매화 20선에 드는 운리의 야매 노산매 남사마을의 최씨매 이씨매 등이 유명하다.

조선 중기 대표적인 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부터 7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던 산천재山天齋 앞뜰에는 선생이 생전에 심었다는 남명매南冥梅가 있었다. 노쇠하여 가지 여기저기에 생명연장을 위한 흔적들이 보이고 있지만 봄날 자신만은 꽃향기를 흩날렸던 결실로 매실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산천재 마루에 앉아서 따뜻한 봄날 그 시절 남명 선생을 매료시켰던 그 매화향을 그려보았다. 산천재라는 글씨가 걸린 헌판 위에는 희미한 그림이 몇 점 그려져 있다. 밭을 가는 농부와 소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신선들 개울에서 귀를 씻고 있는 선비의 그림 등이라고 한다. 하지만 누가 언제 그렸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아쉬웠다. 산천재의 기둥에는 남명 선생의 청빈한 선비정신을 알 수 있는 시가 담겨져 있었다.

봄 산 어디엔들 아름다운 꽃이 없겠는가 春山底處无芳草
내가 여기다 집을 지은 이유는 다만 하늘이 가까워서다 只愛天王近帝居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白手歸來何物食
은하가 십리나 되니 먹고도 남겠네 銀河十里喫猶餘.

석탑이 있어 마을 이름도 탑리로 부르는 단속사터
절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오면 미투리가 닳아 없어졌다는 신라 대찰의 전설에서 전해지는 옛 절의 규모를 말해주듯 당간지주가 석탑과 멀찍이 떨어져 솔밭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주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며 동서 40 cm정도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데 내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지상에 드러난 당간지주의 높이는 약 367cm이다.
당간지주를 지나 마을 쪽으로 향하면 단속사 옛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다. 서탑은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나 동탑에 비하여 많이 부서지고 안에 봉안된 사리함이 도난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었다. 동탑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아무 기교없이 다듬어 놓은 단아한 모습으로 천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그 자태를 잃지 않고 있는 석탑들은 그것으로 이미 지난 세월의 풍상을 모두 말해준다.
석탑 뒷편에는 정당매政堂梅와 정당매각政堂梅閣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었다.
오른쪽 비에는 정당문학통정강선생수식매비政堂文學通亭姜先生手植梅碑 왼쪽 비에는 통정강선생수식정당매通亭姜先生手植政堂梅碑라 음각되어 있었다.
모두 강회백이 매화나무를 직접 심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당매는 고려말 조선초 사람인 통정공 姜淮白(1357-1420)형제가 소년시절에 단속사에서 공부하며 매화를 심었는데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고 해서 후대인들과 승려들로부터 정당매로 불리면서 63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1982년부터 경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노거수임에도 불구하고 올 봄에도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있었다.
조선시대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에서 /누각의 난간에 기대어 앞뜰을 보니 가지를 벌린 매화가 있었는데 이를 정당매라 한다/ 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탑 뒤편으로는 대웅전과 누각이 있은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민가들이 옛 대웅전터를 차지하고 있었고 연화문양이 선명한 석재들은 민가 여기저기에 일상사의 용도로 사용되어 지고 있었다.

만년에 거처하던 산천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단속사가 있어서인지 학문적 수양을 위하여 가끔 단속사에 들린 남명선생은 정당매에 관한 시 몇 편을 남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여년전 사명당과의 만남을 남명문집에서 증유정산인贈惟政山人이라는 시로 남겼다. 정당매가 푸른 열매를 맺었으니 아마 지금 같은 때였던가 보다.

조연 돌 위에 꽃 떨어지고 花落槽淵石
옛 절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春深古寺臺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 別時勤記取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나니 靑子政堂梅

또한 단속사정당매斷俗寺政堂梅라는 칠언절구도 남겼다.

절은 부서지고 중은 파리하며 산도 예와 다른데 寺破僧羸山不古
전왕은 스스로 집안 단속 잘하지 못했네 前王自是未堪家.
조물주는 정녕 추위 속의 매화의 일 그르쳤나니 化工正誤寒梅事
어제도 꽃 피우고 오늘도 꽃 피운다네 昨日開花今日花.

마지막으로 들린 남사마을은 산청군 단성면에 소재하고 있는 조선시대 부농들이 살던 전통마을이다. 최씨 고가로 향하는 마을 돌담길의 풍경은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만큼이나 다정하고 따스함을 전하며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 마을 안을 찬찬히 둘러보면 투박한 돌담길이 정겹게 이어지고 지나치다할 정도로 높다란 돌담 위로는 매화나무가 군데군데 서 있었다. 그중 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117호인 최씨고가에는 최씨매로 불리우는 오래된 백매가 있고 이씨고가 선명당善鳴堂 좌편 담장가에 이씨매로 불리우는 홍매가 있다.

산청삼매의 하나인 분양매汾陽梅(원정매)는 32대째 살고 있다는 분양고가汾陽古家에 있었다. 고려말의 문신 원정공 하즙(元正公 何楫) 선생이 심었다는 매화이다. 남사마을 끝자락에서 위치하고 있는 분양고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 집 대문 바깥에 친절하게 [매화집]이라는 푯말이 있었다.
분양고가는 동학란 때 소실 된 채 지금은 그의 31대손이 새로 집을 지어 분양고가汾陽古家라는 석정石汀이 쓴 액자를 걸어 놓아 옛 명문가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대원군의 원정구려元正舊廬라는 친필액자가 사랑방 앞에 걸려 있었다.
원정매는 수령이 700여년 되는데 올해는 꽃을 피지는 않은 듯했다. 잎이 없는 가지만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남명매와 정당매와 달리 매실도 보이지 않았다.
분양매 앞에는 자그마한 원정공이 쓴 매화시비가 있었다.

원정공 매화시 元正公 詠梅詩
집 양지 일찍 심은 한그루 매화 舍北曾栽獨樹梅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臘天芳艶爲吾開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明窓讀易焚香坐
한점 티끌로 오는 것이 없어라 未有塵埃一點來.

봄이면 마음자락 한 곳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들이 여럿이지만
그 중 매화 향기와 매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마도 봄을 기다리게 하는 으뜸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번 답사의 덤으로 산청삼매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물론 매화가 피는 시기를 맞추어 산청삼매를 감상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꽃이 아니라 해도 옛사람들의 정취를 만나고 느낄 수 있음 또한 행복한 일이다.
옛 선비들은 매화의 향기는 암향暗香이라고 했다.
삼라만상이 고요와 어둠 속으로 잠들 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시각과 청각 다른 감각을 모두 닫고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마음을 적시는 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음을 흠뻑 적시는 매향을 만나고 느낄 수 있어서
봄이 아니라 해도 산청은 언제나 향기로운 곳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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