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3-10 00:00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하여(고령답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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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 김종직의 불천위신주(不遷位神主)를 모신 사당

언제부터인가 주말이 가까워지면 일기예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창을 열면 소곤거리며 들리는 처마에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여름날 장대비가 내리면 차창을 때리는 경쾌하고 장중한 울림
웅덩이에 고인 물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작은 파문을 만들고
동심원들이 서로 겹쳐져 커다란 원이 되고
비에 젖은 잎사귀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보여주는 초록의 군무群舞
비 그칠 즈음 햇살이 비추이면 물기 가득한 세상은 온통 맑고 싱그러움으로 넘쳐나고...
이런 것들이 있어 비 오는 날을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다 꽃을 만나고 답사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늘 햇살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비가 올 거라는 예보에 봄 언저리에서 감기와 다시 조우할까 미리 저어하여 단단히 차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햇살은 화창하고 건물내부의 난방이 부담스러워지고
차가운 것들이 그리워지는 체감온도는 이미 여름이었다.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서 처음 만나는 시간..
그동안 수고하신 분들에 대한 고마운 인사와 또 품평(?)들을 하면서
수선스러운 안부들을 나누고 대가야를 향하여 길을 나섰다.

대가야박물관의 첫 인상은 건물의 외관이었다. 박물관 지붕은 어떤 분은 능의 곡선을 닮았다고도 하셨지만 설계개념(concept)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겨운 옛 마을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박물관 마당에는 행사가 있는지 몇 분이 모여서 이엉을 엮고 계셨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
아담한 초가마을 같은 박물관 건물 전면에는 그에 어울리는 소박한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는 석조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삼층석탑과 석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좌대와 광배를 모두 갖추었으나 훼손과 마모가 심한 상태였다. 이곳의 불상들도 다른 곳과 다름없이 4기중 3기는 무두불無頭佛이였다.
고령군 내에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것을 모아 고령향교 뒤편의 연조공원에 전시하다가 2004년12월 대가야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박물관 내부에는 1904년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 시대의 시대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박물관 전시 유물 중 보부상 유물인 물금장勿禁杖[보부상 반수의 지휘봉]이 눈길을 끌었다.
보부상의 우두머리인 백초산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가던 인조대왕을 도운 공로로 이 막대기의 상단에 임금옥새와 손잡이에 왕자를 새겨 하사한 물금장이다. 이처럼 보부상은 주로 상품의 매매를 위주로 하는 것이었으나 나라에 환란과 위기가 닥칠 때에는 적지를 정찰하거나 의용군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우기도 하였다.
상무사商務社란 조선말기인 고종년간에 성행했던 행상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관으로 부상負商인 左社와 보상褓商인 右社로 구별된다. 즉 보부상이란 봇짐으로 싸서 장사하는 보상 즉 상무우사商務右社와 지게에 짊어지고 등짐으로 장사하는 부상 즉 상무좌사商務左社를 통칭한다. 이곳 고령 상무좌사는 오늘날에도 임원구성은 물론이고 행사에 있어 정기적 총회와 기타 대제大祭를 위시하여 계절로 거행하는 절사節祀 등 빠짐없이 옛날의 유습을 이어가고 있다.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한 보부상들의 부조계인 좌사계는 10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을 섬기는 후손들의 숭모정신과 서로 돕고 살아가는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보관상 박물관 내에 전시된 유물 몇 가지가 눈에 들어 왔다.
그 중 하나인 개포리 석조관음보살좌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113호로 고려시대 석불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불상의 뒷면에는 ‘옹희(雍熙) 2년(고려 성종 4년 985) 을유 6월 27일’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지방 장인이 광주 약사마애불좌상과 같은 세련된 조각을 본떠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초기 지방에서 장인의 손으로 만든 토속화된 불상의 양식을 알려주는 자료로 중요하다. 전체적인 윤곽은 돋을새김하고 옷주름이나 연꽃무늬 등은 선으로 긋는 도식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머리에 쓴 관(冠)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손에 연꽃가지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둥글 넓적한 모습이고 좁은 코 작은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7호 반룡사 다층석탑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장중하고 규모가 큰 탑이 아니라 소담스러운 모습이었다. 고려시대의 다층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은 대부분이 화강석으로 조성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점판암 재질로 조성되어졌다.
점판암제의 경우는 육각 팔각 등 다양한 다층석탑이 나타난다. 반룡사의 석탑도 점판암을 연마하여 조성한 소탑이다. 형태는 2단으로 된 방형의 화강석 기단에 다시 사각형의 점판암으로 된 2층의 연화대를 두고 그 위에 옥신을 잃은 옥개석만을 쌓아 올렸다.

반룡사 동종은 종신鐘身 상부에 용뉴가 있고 상대부분에 육자진언六字眞言의 범문과 함께 중종中鐘이라는명문이 있다. 상대와 하대 그리고 윤곽과 당좌 등이 생략된 조선 후기의 간략화된 동종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조성연대와 명문이 있어 18세기경의 동종 양식을 알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종도 다층석탑도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건물 안 유리상자 속에 갇혀(?)있는 모습이 안스러웠다.

박물관에는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여러 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마음을 바쁘게 만들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집들과 유품들이 있었고 그 중 茶園이라는 시와 조의제문은 이해하기 쉽도록 한자음과 풀이를 적어 놓았다.

꽃이 피는 아름다운 마을 개화실開花室이라는 유래를 가진 개실마을에는 한참 공사가 진행중이였다. 옛 것을 이어가고 지켜가는 것만큼 새로운 물결로의 동참도 필요한 듯 했다. 마을 어귀의 한 집에는 늙은이의 겨울 해소기침 같은 낡은 스레이트 지붕 뒤로 대나무 잎은 누렇게 말라 바람에 서걱거리고 있었다.
개실마을 안어른들이 해주시는 점심밥은 옛 기억 속의 동네 큰 잔칫날 먹었던 것과 같은 밥과 나물 그리고 쑥국은 봄을 입안 가득 느끼게 했다.
점필재 종택 사랑채 마루에는 文忠之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조상의 덕을 기리고 이어가고자 하는 후손들의 마음인 듯 하였다.
사랑채와 안채 마루의 기둥 중 일부에 임진왜란 후 궁궐이나 사찰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던 원기둥이 있었다.
마을길 끝에는 한쪽이 떨어져 나간 회벽과 돌담이 오후 햇살에 적막히 서 있고 종택 사랑채 댓돌에는 뒤꿈치가 벌어져 굵은 실로 기운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말끔히 씻긴 채 놓여 있고 담벼락 한쪽에는 똥장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낡은 필름 속에서처럼 오래된 기억속의 풍경들이 따스하게 다가오면서 왠지 모를 아련한 슬픔이 몰려왔다.

도연재 담장 너머 이제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버려진 옛집은 흔적들이 즐비하고 찢겨진 창호지 사이로 문살들이 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연재 아궁이 부엌에는 이제는 불 땔 일이 더 이상 없는 것을 아는지 잡초가 무성히 자라고 부엌 바람벽에는 백묵으로 한 낙서가 어릴 적 기억이 나서 잠시 미소 짓게 하였다.
대청에는 도연재석채례道淵齋釋菜禮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공자 맹자 주자 등의 성인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유래된 석채례釋菜禮란 1년에 한 번 봄철 새로 나는 나물과 생야채로 스승에게 제를 지내는 의식으로 전국에 흩어진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업덕을 기리고 학통을 이어가는 유학의 독특한 전통으로 봄 가을로 지내는 곳도 있다.
제사를 주관한 헌관獻官 장의掌儀 축祝 집례執禮 찬자贊者등 각자의 맡은 역할에 따른 이름들이 기록되어져 있었다. 그 역할이 다양하여 조선시대 제례에 대한 공부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종택 지붕에도 도연재 지붕에도 바위솔들이 지난 계절을 되짚어 돌아보게 한다.

반룡사는 사찰의 규모도 암자처럼 작고
동종도 다층석탑도 관리상의 이유로 대가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고..
조선시대의 부도 몇 기와 비신碑身이 없는 귀부龜趺 하나가 절 입구에 서서 오래된 나무들과 함께 고찰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고려읍지高靈邑誌에는 [在縣西三十里 美崇山下 有元世祖榜文]이라 했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형을 그대로 살린 축대 위에 약사전과 지장전이 옛 모습을 보이고 축대 아래에는 최근에 신축된 대웅전이 있었다.
대웅전 마당에는 스님이 한가로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축대 아래에는 수줍은 제비꽃이 고개를 살그머니 내밀고 보랏빛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는 구절처럼 그렇게 봄이 왔음을 실감케 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가야의 순장 문화에 대한 실례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순장의 시작은 원시사회부터 통일 신라까지의 순장이라는 틀로 단계 지워 본다면 순장이 행해지지 않던 단계 고조선에서 부여에 이르기까지 순장이 대규모로 행해지던 단계 신라 가야의 6C 초인 순장 규모 축소와 대상이 바뀌는 단계 신라 지증왕3년에 순장이 금지되면서 이를 대체하는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순장을 통하여 한국 고대사에서 순장의 의미는 주 피장자와 피순장자간의 지배 예속 관계를 극명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순장 실시 여부가 해당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대가야의 옛도읍지인 고령은 대가야의 본거지로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 최고층의 묘역이다. 시기적으로 5C 후반에서 6C 전반에 걸친 것으로 이중 44호분은 지산동고분군중 대형급에 속하고 여기에는 30인 내외의 사람이 순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석곽사이에 말의 치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의 순장사실도 확인된다. 지산동 44호분을 통해 보듯이 대가야의 순장이 다른 지역 특히 신라와 여타 가야지역의 순장과 다른 점은 순장자들도 각각 독립된 무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산동고분군은 신라와는 달리 산지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가야의 옛 도읍지 고령을 감싸고 있는 주산의 남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가야최고 최대의 고분군이다. 1906년 세키노가 첫 발굴 조사한 이래 1915년 구로이타 1917년 이마이시 1918년 하마다 1939년 아리미쓰·사이토 등이 다수의 고분을 조사하였으며 1976년 사적 정화사업 때 외형이 확실하고 비교적 큰 고분에 한하여 일련번호를 매겨 현재 72호분까지 정해져 있다. 대형분은 주로 능선 상부에 중형분은 능선 중간이하에 군집하고 있고 소형분은 능선 아래위 구분 없이 대형분과 중형분 주위에서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산동 44호분에서는 도굴로 인하여 많은 유물이 멸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00여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고배·장경호·그릇받침 등 다양한 형태의 토기류이며 무구류로는 환두대도·투구·은장철모·화살촉 마구류로는 말투구· 등자·행엽 장신구류로는 금제이식·경식 등이 발견되었다.
그 외 생선뼈 닭뼈 말이빨 등이 함께 출토되어 주인공이 내세에 현생과 똑같은 생활을 누리게 하기위한 많은 배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고배와 장경호 그릇받침 등과 똑같은 모양의 것이 경남 거창·함양 전북 남원·임실·장수·진안 등지에서도 발견되어 대가야문화가 그곳까지 뻗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지산동 고분군의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에 는 키큰나무 아래 벤취가 놓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는 배려가 있고..
정상에서는 고령 전체를 굽어 볼 수 있고 여기서 맞는 일출도 장관이라고 한다..

3대 악성(우륵 박연 왕산악)의 한 분인 우륵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977년에 우륵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가야금은 위가 둥그니 이는 하늘을 뜻하고 아래가 평평하니 이는 땅을 본뜬 것이라고 하며 이 악기가 순수한 대가야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신라인은 가야금이라고 칭하게 되었고 한다.
그러나 기념탑은 관리상태가 소홀하여 마감이 여기저기 벗겨지고 조잡한 느낌마저 들게 하였다. 가야금 대신 김주형님의 대금연주회가 옛 흥취를 자아내고..
대금도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의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연주회가 진행되는 진지하게 연주를 즐기는 한편 고령특산인 잘 익은 달콤한 딸기와 차 그리고 간식들을 먹는 즐거움도 있었다.
기념탑 한편에는 우륵선생의 영정각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져 있어서 담 너머에서 기웃거리기만 하고..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망울을 열고...

양전동 암각화는 1971년 발견되었다.
겹둥근무늬(同心圓) 십자(十字)무늬 탈(假面)모양 등을 쪼기수법으로 새긴 선사시대의 암벽조각이다. 겹둥근무늬는 세겹인데 모두 4점으로 해나 달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탈모양은 17점이나 새겨져 있어서 이 암벽조각의 성격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예로는 경상남도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와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 포항 구룡포 암각화 경주 금장대 암각화가 있다.
탈 모양은 위가 넓은 사다리꼴에 사방구멍을 새겼는데 눈 코 입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형태는 울주 반구대나 시베리아 암벽의 탈과는 차이가 있고 그 모양이 방패형태와 비슷해서 탈이 아닐 수도 있지만 시베리아 탈 가운데 이와 유사한 모양이 있어서 탈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들 둥근무늬나 탈모양 등은 우리나라 선사 암벽조각을 대표하는 울주암벽조각에 비해서 그 모양이 상당히 단순화 되었고 기법 역시 도식화 내지 형식화 되었으므로 제작연대는 인접에서 발견되는 석기나 비슷하게 청동기 후기 내지 초기 철기시대로 생각된다.

보호각이 만들어져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실측도에 그려진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오랜 세월동안 제 모습을 지니고 있던 석조유물들이 근래 몇 십년동안 심각하게 마모가 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문명이 지닌 또 다른 이면을 보는 듯하여 씁쓸한 마음이다.
후세에는 아마도 실물이 아닌 도서로 양전동 암각화를 만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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