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2-14 00:00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부안변산고창지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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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답사는 올해도 강추위와 함께 했다.
답사를 다닌다는 것을 나는 늘 그리 생각한다.
무엇을 얻고 익히겠다는 생각보다는
떠난다는 것 떠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새로운 기대와 가득한 설렘을 가져다주기에 답사 길은 늘 즐겁고 행복하다.
때로는 기대와 설렘에 미치지 못하고 실망한 곳도 있지만
그 시간과 공간속에서 함께 한 사람들과의 교감과 공감
새로운 느낌과 시각들. 그런 것들이 다음 답사를 또 기대하게 한다.

하나 왕궁리오층석탑
여름(2003.7.5.)의 절정에서 만난 왕궁리오층석탑의 자태는
초록의 들녘과 하루를 마감하는 노을에 물든 하늘과 어우러져 막 날개를 조심스레 펴고
비상을 준비하는 늠름한 봉황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문화재적 역사적 가치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냥 눈앞에 펼쳐진 그 자태와 주위와의
어우러짐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바라만 보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느낌.
탑을 보고서 그런 마음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다시 찾은 모습은 발굴을 위하여 파헤쳐지고 토사의 붕괴를 막기 위해 쳐 놓은 비닐천막만 어지럽고...
골조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건물의 내부처럼 탑만 덩그마니 놓여 있고 삭막하고 황량한 모습이었다.
존재 자체로서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주위와의 어울림으로
그 아름다움이 한층 더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내가 완성하고 싶은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언젠가 좋은 사람과 함께 와서
/당신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다고/라고 말하고 싶었던 정경이였는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역사는 늘 현재이다/고 말한 이홍렬선생의 이야기처럼
늘 그 시점의 현재일 뿐 그 시점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물론 현상이 달라졌을 수 도 있다) 지금의 내가 가지는 인식과 감정의 폭이 그때의 크기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뒷걸음질치며 돌아보면서 나왔다.

왕궁리 오층석탑의 제작연대에 관하여서는 부산일보(2004-11-05)기사에 따르면
1965년 석탑 해체 복원과정에서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와 함께 1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여래입상이 나와 제작시기를 나말여초 또는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불국사 석가탑 사리장엄구 등과 유사성을 들어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란 설이 대두됐다.
이런 논란 속에서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를 7세기 전반 백제 무왕시기에 제작된 백제의 유일한 사리장엄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통도사 성보박물관과 불교미술학회가 공동주최해 5~6일 열리는 제 4회 추계학술대회에서 한정호 통도사 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는 석탑 제작이전에 백제계의 목탑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사리장엄구의 문양이 당시 백제에서만 유행하던 형태였다는 점을 들어 고려 또는 통일신라시대 제작품이란 주장을 뒤집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금제사리내합의 문양. 구름문양과 연꽃문양이 결합된 연화서운문(蓮花瑞雲紋)이다.
연화서운문은 부여 능산리 고분출토 금동산형투각장식과 나주 복암리 출토 대도 손잡이 장식 등 10여점과 유사성을 띠는데 이들 유물이 출토된 유적이 모두 6 세기 중반~7세기 전반의 백제 사비시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다른 문양인 어자문(魚子紋)의 경우도 입자가 촘촘하고 중복시켜 표현한 신라의 금속공예품과 달리 백제불상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처럼 겹칩이 없고 비교적 성기게 시문돼 있다.
이와 함께 왕궁리 오층석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최근 왕궁리 발굴조사를 통해 석탑의 아랫부분에 석탑에 선행했던 목탑의 판축구조가 확인됐다는 점 석탑 기단 안에 있는 품자(品字)형 사리공이 백제 목탑의 심초석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런 논리에 따라 그는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가 백제 유일의 사리장엄구이며 완전한 형태로는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라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했다

둘 개암사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을때
우(禹)장군과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의 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년(1314)에 원감국사가 이곳에 와서 절을 다시 지어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개암사 일주문의 공포에서 특이하게도 지신상이 새겨져 있었다.
익살스런 모습의 원숭이상이 잠시 미소 짓게 했다.
개암사 경내에 들어서면 석축 위로 보이는 대웅전 범종루 절 뒤의 울금바위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잠시 발을 멈추게 한다. 쨍하고 소리날 것 같은 하늘과 대웅전 옆의 잘 익은 호랑가시나무의 붉은 열매도 겨울의 한 자락을 엮어가고 있었다.
대웅전의 공포에 용이 조각되어 있고 불단 위 닷집에도 법당의 천정에도 용조각이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는 개울가 한편에는 갯버들이 보송보송 피어나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셋 구암리고인돌군
구암리 고인돌군은 남방식 고인돌 군락지로서 사적 제 103호로 지정되어 있고 받침돌이 높은 것과 받침돌이 8개가 있는 것 등은 다른 곳의 고인돌과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가장 큰 것은 개석의 길이가 6.5미터나 되며 전체 형태가 거북등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을 가운데 민가를 철거하고 별다른 보호시설 없이 사적이라는 표지판만 있었다.

고인돌이란 선사시대 돌무덤 유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만주 일본 유럽 북아프리카 등 전세계에 분포한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나 거석(巨石)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로 중국은 석붕(石棚)·대석개묘(大石蓋墓) 기타 지역에서는 돌멘(Dolmen)·거석(Megalith)등으로 부른다.
고대인류의 무덤으로서의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것이다. 또한 더러는 자기 영역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강성한 힘을 외부에 표시하는 표석 상징물이기도 하고 더러는 종족이나 집단·사회의 모임장소이기도 하고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인돌들이 분포하고 있는 상황은 무리를 지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전라남도에서도 고인돌은 예외없이 무리를 지어 발견된다.

넷 새만금
채석강을 향해 가던 길에 새만금사업지역에서 잠시 멈춰 섰다.
갯벌에는 /새만금갯벌은 살아야 한다. 해수유통하라/ 라는 현수막을 단 새만금사업반대의 환경조형물은 찬 바람에 바다를 그리며 서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 있고 솟대위에 올려져 있는 배들은 넓은 바다의 파도를 가르며 항해하는 꿈을 꾸고 있을 것 같았다. /친환경개발 새만금/을 건물 외벽에 크게 써 놓은 새만금전시관은 정부의 정책홍보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히(?) 하고 있었다.
방조제 위를 쉼 없아 오가는 대형 공사용 차량을 보면서 인간이 관여한 친환경사업이란 있을 수 없는 말장난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속도로에도 자연과 어우러지는 고속도로라는 글을 떡하니 붙여놓고 있다. 인간이 벌인 사업치고 자연을 파괴하지 않은 경우가 한번도 없었는데 그런 말을 쓴다는 것은... 자연보존을 한다고 할 때 후손에게 빌려온 것이니 고이 물려주어야 한다는 말도 흔히 사용한다. 그런데 지금 마구 훼손하고 있는데 어떻게 고이 물려줄 수 있을까? 우리 후손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자연을 이용하고 관리하고 싶어할텐데...

다섯 채석강
채석강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에 있는 해식절벽과 바닷가로서 명칭 유래는 두가지로 나누어 추정하고 있다. 하나는 당나라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국 채석강과 흡사하다 하여 채석강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하나의 유래는 돌을 쌓아 놓았다는 뜻(彩石)의 한자풀이에서 찾을 수 있다.
바닷가의 저물녘은 겨울바다의 찬바람도 참아 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바닷가에서의 해넘이를 기대하였으나 바람은 더 차갑게 불고 구름은 자꾸만 두꺼워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바닷가에 나가 보았으나 구름사이로 한 줄기 빛만 만날 수 있었다.
올해는 해돋이와 해넘이를 제대로 만나고 싶은 작은 바람하나를 이룰 수 있을까?
이 바다에서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다면 이태백처럼 고운 시 한 수를 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한 때 한시에 관심 있었던 시절에 내가 즐겨 읽었던 이백의 시 하나를 적어 본다.
/애술(?)/하시는 분들이 무척이나 좋아할 시이지만 부디 자연과 합치되지는 마시기를...

月 下 獨 酌 달밤에 홀로 술 마시며

天若不愛酒 하늘이 만일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 하늘엔 주성이 없었을 것이고
地若不愛酒 땅이 만일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 땅엔 응당 주천이 없었을 것이다.
天地旣愛酒 천지가 이미 술을 사랑했거늘
愛酒不愧天 술 좋아함이 하늘에 뭐 부끄러울까
已聞淸比聖 청주는 성인이요
復道濁如賢 탁주는 현인이라
賢聖旣已飮 성현을 이미 마셨거늘
何必求神仙 하필 신선을 구할소냐
三盃通大道 석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 한말이면 자연에 합치된다
但得酒中趣 오직 술 속에 흥취 있을 뿐
勿爲醒者傳 깨어 있는 자에겐 전하지 마라.

여섯 내소사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전나무 숲길에는 침엽수 특유의 맑은 향이 아침공기에 묻어 마음까지 맑게 하였다.
내소사의 요사채에는 특이하게도 來蘇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 사찰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이여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외부인출입금지에도 불구하고 살그머니 들어가 보았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자형의 폐쇄적인 평면을 하고 있으며 선암사의 심검당처럼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고 있었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되어 있었다.
설선당 지붕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독수리(?)같은 자세로 치미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전설이 있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법당 내부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보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늘 그러하지만 법당 안에서 셔터를 누른다는 것이 불경한 느낌이여서 조심스럽기만 하고 그래도 남겨두고 싶은 모습이 있어서 망설이게 된다.

대웅전의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 년의 세월속에 단청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 있다. 법당 안에서 보면 창호지를 통해 마름모꼴의 문살만 보이고 외부에서 보는 그 화려한 문양의 흔적은 없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서후기의 서예가)가 쓴 글씨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자 전어 굽는 냄새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식사를 마친 포만감에도 불구하고 전어 한 마리를 들고 머리부터 한입 베어 물자 아싹거리는 느낌과 고소함이 입안 가득하다.

일곱 곰소항
아마존이나 지중해 유역과 더불어 세계 5대 갯벌중 한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이용 가치가 높은 곳이 채석강과 곰소 고창을 꼭지점으로 하는 곰소만(줄포만)의 갯벌이다. 채석강을 기점으로 해서 곰소까지 도로를 따라 가면서 끝없이 펼쳐진 갯벌을 보게 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갯벌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 곰소는 이 갯벌의 끝에 자그맣게 매달려 있는데 곰소 젓갈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곰소항 한켠 횟집 화목난로 옆에 코 주위에 까맣게 그을음을 잔뜩 묻히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겨울날 어린 시절 양지쪽 둔덕에서 불장난하던 우리들의 얼굴 같아서 웃음이 났다.

여덟 반계서당
반계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뒷날 이익 홍대용 정약용등에게 이어져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1770년(영조 46)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26권이 간행되었다
반계서당을 오르는 길은 꽤나 가파른 편이였다. 산 중턱에 있는 반계서당을 오르다 숨을 잠시 고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선비가 갖추고 지켜가야 할 덕목에 대하여. 조금의 육신의 편안함도 경계했던 그들의 삶에 대해서..
산길에는 청미래덩굴 열매가 곱게 익어 있었고 유난히 알이 굵었다. 현석이에게 청미래덩굴을 이야기하면서 망개와 망개떡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했지만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 얼굴을 하고.. 반계서당 담 밖에는 여우콩이 붉은 꼬투리사이로 검은 씨앗을 여물고 있고 참마가 바람에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지금의 집은 그 터에 새로이 지은 것이고 대문을 들어서자 우물하나가 보인다. 납작한 돌을 돌려가며 쌓은 옛 우물은 사용하는 이 없이 지난 빗물이 흘러들어 부옇고 이끼가 끼여 있다. 반계서당 마당에 서서 저 아래 마을을 보면서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그려보면서 그의 사상들에 대하여 다시금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아홉 선운사
늘 그러하지만 선운사는 마음속의 느낌과는 다른 시간 속에 들리게 된다.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시절에도 꽃무릇이 선혈같은 붉음을 빛내던 시절에도 늘 그리워만 하는 곳이다.
동백숲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검푸르기만 하고..
가을날의 절정을 보여주는 길에는 얼음장 밑으로 봄 오는 소리가 살며시 들여오고..
선운사 입구 미당의 시비는 그대로인데 주변은 자연생태체험장을 만든다는 공사로 마구 헤집어져 있었다.
그는 알았을까? 육자배기 가락이 흘러나오던 곳이 이리 변해버릴 것을..

조선시대 선문禪門의 중흥주로 추앙받는 고승 백파긍선白坡亘琁(1767∼1852) 스님의 부도에서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만날 수 있다.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김정희는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達磨라고 격찬하였다. 스님은 김정희 초의草衣선사 등과 선문의 요지에 대해 거침없는 상호토론을 벌여 근세 불교계의 가장 치열한 교리논쟁을 유발시킴으로써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이후로도 제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선운사의 대웅보전은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비로자나불의 手印은 불국사 비로자나불의 수인과 같은 일반적인 수인과 달리 독특하여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인 대웅보전이라는 명칭과 함께 약간의 혼란을 가져왔다.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 주신다는 도솔암 부처님과 도솔암마애불을 못 보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열 고창고인돌
고창군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조밀한 고인돌의 분포지역으로 그 수는 약 2000여기 정도 된다고 한다.
고인돌문화는 생활유적의 범위를 넘어선다. 당시 시대인들에게는 지도자나 지배세력의 힘의 상징이자 영혼의 안식처였다. 싸우다 전사한 용사들을 추모하고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생활중심지나 바다·큰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에 세워진 고인돌은 당시사람들의 정신적 구심체이자 종교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이었고 사회질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자연의 거센 힘앞에 여전히 약했던 인간이었던지라 영원불멸의 자연물인 돌을 신앙심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기념물을 축조한 것이기도 하다. 구릉위나 산중턱에 세워진 고인돌은 자기 영토의 표식이나 대외에 힘을 과시하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우리 조상은 더러는 수십명이 더러는 수백명이 동원되어 10t에서부터 100t도 넘는 초대형 덮개돌을 옮겨 역사를 만들었다. 아울러 집단을 형성하고 집단끼리 상호 협동체계를 이루는 공동체 사회를 만들었다
고인돌 체험장에는 그 시절 고인돌을 만들기 위하여 돌을 옮기던 것을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몇몇 분들이 온 힘을 다하여 돌을 끌어 보았으나 꼼짝하지 않고...
단순한 힘으로가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이 저 거대한 돌들을 옮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열하나 고창읍성(모양성牟陽城)
마한시대에는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 이곳에 있었으며 백제 때는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으로 불렸고 통일신라시대 이래 고창현으로 불렸다
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모양牟陽으로 불리는 이유는 어디서든 찾아 볼 수 없었다.
모양성은 읍성이기 때문에 군사적 기능과 행정 기능도 겸했다. 성안에 향청 서청 장청 동헌 객사 옥 등 스물 한 채의 관아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 모양성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답성놀이가 전승되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 한다는 믿음이 전해져 지금도 음력 삼월 삼짓날과 사월 초파일 구월 중양절에 인근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밟기를 한다.
극락왕생까지는 아니라도 무병장수를 위하여 두 바퀴 돌고 싶었으나 세찬 겨울바람을 핑계로 객사를 돌아서 지름길로 반 바퀴만 돌았다.
고창읍성 앞에는 우리나라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리한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 있었다. 이 고택의 특이한 점은 마루가 건물의 전면이 아닌 후면(북향)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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