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1-06 00:00
대마도가 우리땅인 이유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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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지만 모르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대마도에는 아직도 우리역사의 흔적들이 산재하여 남아 있었다.
최익현선생공적비와 박제상순국비 앞에서 비록 보잘 것 없고 조촐한 제수지만
마음으로 정성과 격식을 다해 술 따르고 절을 올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조상님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들이 과연 무엇 이였을까?
이 땅을 지키지 못하고 방치하여 일본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이 곳이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의 당위성이 우리에게 있을까?
섬 전체를 둘러보면서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가꾸며 훼손하지 않고 지켜온 현지인들이
엄청 고맙게 여겨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일본의 세시풍속 중에는 그들은 문을 닫고 집 안에서만 보내는 풍속이 있다. 특히 그러한 경향은 도시의 상인들에게 강하여 가령 교토(京都)의 상인들은 초하루부터 3일간 또 에도(江戶)에서는 하루동안 대문을 열지 않고 주렴을 길게 늘어뜨리고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기간에는 세배인사마저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시기에 여행을 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문을 열지 않고 집안에서 근신했던 것은 福神이 집에서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이는 마치 설날 때 청소를 하거나 먼지를 털고 그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복이 나간다는 속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날에는 부녀자들이 물에 손을 담그지 않는다 하여 가능하면 설거지를 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도 모두 복신과 관계가 있었다.

설날장식으로
첫째는 대문의 입구에 장식하는 것이다. 가도마쓰(問松)란 일본설날의 장식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점심을 먹으로 들렀던 미녀총산장식당의 입구에 있던 것이다. 이는 설날의 신이 강림하는 도구로서 문 입구의 양측에 세우는 장식물이다. 그 모양은 비스듬히 자른 3개의 대나무를 화분에 심듯이 세우고 그 뒤에 소나무를 덧붙여 세우고 그리고 밑둥치에다 짚 또는 나무토막을 엮어서 둘러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나무를 두 개를 하는 곳도 있어 지방에 따라 특색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다 새끼를 치고 또 감귤과 시데(四手)라 하여 흰 종이를 길게 오려 매달기도 한다.

둘째는 문에 장식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설날이 되면 출입문에다 여러 가지 물건으로 장식한 새끼를 쳐놓는 풍습이 있다. 이를 시메나와(左繩)라 하는데 설날의 신이 머물고 있다는 표시이다. 일종의 금줄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출산한 집에 치지만 일본에서는 신이 있는 곳에 친다. 설날에는 각자의 집에 설날의 신이 강림하여 있기 때문에 이러한 표시의 장식을 해놓는 것이다. 볏짚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나 공통점이나 그 모양과 그것을 장식하는 내용물은 지역마다 각기 조금씩 틀린다. 그 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형태는 새끼의 중앙 부분에다 감귤 종류의 과일을 하나 달아 놓는 것이다.

한국의 지게 역시 대마도에서도 /지게/로 불린다. 총각 친구 등 일본의 . 대마도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도 대마도엔 주기적으로 /조선 붐/이 일었다. 관료 학자 통역관 악대 등 50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갈 때면 대마도는 후끈 달아올랐다고 한다.
대마도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웬만한 절이나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이라는 대리석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하는아리랑 마쯔리가 매년 열리고 있다.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한다. 주로 부산 동래구청장이나 구의회의장이 초청돼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타던 가마에 탄다. 그 호위는 대마도에 진주해 있는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장이 맡는다.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유물 중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고쿠신)이 전시되어 있다 한다. 대마도가 조선에 정치적으로 예속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이를 받은 사람들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불렸다. 그러나 휴무인 관계로 아쉽게 볼 수가 없었다.

대마도에 우리민족이 텃밭을 일구고 우리와 똑같은 생활문화권 안에서 삶을 이루었다는 것은 바로 현지의 문화유적과 생활습속이 대변하고 있다
이 섬이 일본영토가 된 것은 섬의 지정학적 여건이 일본의 교두보로서 외교통상과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양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도의 왜인은 도래(신석기시대)한 삼국인들과 가야인들의 분국형태로 존재하다가 삼한의 분국이 형성되고 그 후로 금관가야의 땅(408년이전)을 이어 임나연정(任那聯政)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계속된 이주민 집단은 규슈와 혼슈 및 시코쿠 연안에 정착한 한인의 소국들(규슈의 축자국 기비국 이즈모 지방의 소국)과 연계되어 오랜 세월동안 결속되어 있다가 7세기 기내지방의 야마토 정권(도래인이 세운 정부)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에서도 대마도만은 조선의 땅으로 존속되어 오다가 조선말 국운이 쇠한 틈을 타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으로 이즈하라번으로 편제되었다가 1877년 일본의 메이지 정부의 팽창정책에 의해 강제로 일본의 나가사키현에 편승된 것이다
19세기 말 이전까지는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음이 경제적 정치적 속국관계 및 동래현에 부속된 도서(島嶼)로서 우리정부에서 임명된 만호 및 위임받은 종씨(宗氏)들이 다스렸다는 생생한 기록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독도 울릉도 등은 육지에서 먼 거리에 위치하여 그 관리가 소홀했고 대마도 역시 예외는 아니였다. 옛날에 동력선이 없었던 그 때 항해술의 미비 등은 파고 높은 도서지방의 행정을 원활히 행할 수가 없었기에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인접 일본국은 대마도를 왜구의 거점으로 삼아 조선변방을 침입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멀리 대마도의 전경을 보면서 섬의 형상에서 對馬를 찾기 위해서 이사장님은 무지 노력하고 계셨다.
對馬란 馬韓과 마주 대한다 하여 부른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대마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 [고대 일본과 대마]에 나와 있다.
대마도를 일본인은 대마(對馬)라 표기하고 "쓰시마"로 읽는다. 여기에 관하여 대마도 역사의 최고 권위자인 나가도메 히사이는 그의 저서[고대 일본과 대마] 및 [고대사의 열쇠 대마]에서 "쓰시마"의 호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 위지 동이전의 끝 쯤에 있는 한조(韓條)에 왜인조가 보이는데 그 첫 머리에 "대마국"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영토의 남쪽 구야한국(가야)에서 바다를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그 곳의 대관(大官)을 히고라 하고 부관을 「히노모리」라고 불렀다는 대목의 "대마국"인데 이것이 최초의 쓰시마(對馬) 기록이다. 또한 위지의 편집자는 "진(津)의 島"라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즉 쓰(津)는 배가 닿는 곳이니 배가 닿는 섬이라는 뜻으로 쓰시마(津島)로 표기해야 옳았고 [고사기]에도 쓰시마로 되어있다.

2. [일본서기]의 편집자가 중국사서를 따라 대마국(對馬國)에서 國자를 빼고 그대로 대마로 기록하면서 읽기를 종래대로 쓰시마로 했다.
이에 대하여 대마도의 지리적 위치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마한(馬韓)과 서로 대한다는 뜻이다(진한 변한은 초기에 마한에 예속됨). 즉 바다 건너 조선쪽에 있는 마한과 마주 대(對)하고 있다는 뜻으로 대마(對馬)라고 하며 처음에는 보통명사로 불리던 것이 고유명사화한 것이라는 학설이다. 대마가 마한과 대한다는 뜻은 곧 대마도가 마한의 분국임을 알 수 있다.

3. 또 하나의 유력한 설로는 한국어의 해설이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 섬에서 유래된 말로서 한국어의 두 섬이 두시마에서 쓰시마로 되었다는 설이다.

위의 세 가지 설이 전부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설은 대마도가 바로 구야한국(가야)에 속했다는 것이 [삼국사기]와 [가락국기] [대동세보]에 기록되었으며 둘째 설은 [일본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조차 대마로 적혀 조선대륙의 마한과 대칭에서 온 것임을 입증하며 셋째 설은 삼한(三韓)의 분국설로 실제 대마도에 삼한과 임나가라가 있었음은 우리 역사에서 밝혀진 바와 같다. 특히 그 곳 대마섬에는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등의 분국은 물론 임나연방이라는 통합된 국가형태(400-479년)가 존속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조선의 영토임이 증명된다 >>>> (이병선의 [임나와 대마도])


대마도가 우리땅인 이유를 나눔투어(http://nanumtour.com/)자료를 인용하여 서술해 본다.

1. 예로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에서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사는 땅이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가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란 그 지방에서 중심되는 마을을 일컫는다. (좌호가라는 신라 인위가라는 고려 계지가라는 백제이다 : [한단고기] 고구려편) (이병선 저 [임나국과 대마도] 문정찬 저 [일본 상고사])

2. 임나는 대마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명칭이며 동과 서에 마을들이 있어 치소(治所)가 있고 조공하기도 하며 배반하기도 하였는데 그 후 대마도가 드디어 임나에 지배되었으므로 그 때부터 모두 임나를 대마라고 일컬었다.
(東西에 各有墟落하여 或貢或叛이러니 後에 對馬二島가 遂爲任那所制故로 自是任那는 乃對馬全稱也라. 自古로 仇州對馬는 乃三韓分治之地也...: [한단고기] 고구려편 (이병선 저 [임나국과 대마도] 문정찬 저 [일본 상고사])

3. 영락 10년에 세 가라(대마도)가 모두 고구려에 구속되었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뉘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연정(聯政)이라 하였다.(400-479년)
(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 海陸諸海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 : [한단고기] 고구려편 <광개토대왕비문> 이병선 저 [임나국과 대마도])

4. 이들 연정(대마도.일기도.말로국.규슈.세도연안.야마토왜)은 고구려에 직할되어 열제(광개토대왕)의 명령없이는 제멋대로 행할 수 없었다(400-479년). 그 후엔 백제가 관할하였다.(然 直轄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 : [한단고기] 고구려편 열제의 비문 내용)

5. 가락국기 편 : 가락국 6대 좌지왕 2년(408년) 왕비 용녀(傭女)가 붕당을 일으키어 국력이 쇠진할 때 고구려 연정(대마왜)이 지배하였다.(신라 실성왕 7년 동진 安義熙3년. 일본 皇反正 3년) (<광개토대왕비문> 인터넷 대마도사료)

6. [삼국사기] 권 3 신라본기 실성왕 7년조 왜가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가락국과 신라는 같이 근심하였다. 대마도를 정벌하려 하는데 미사품(未斯品)의 간언으로 중단했다. [삼국사기] 본조(本條)에도 임나국은 가락의 영토(任那國之所係 赤洛羅古城所係)라 했다. 이 때 대마왜는 임나연정의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다.

7. 대마도는 가락국의 영토로써 ([삼국사기] [가락국기] [대동세보]) 비단무역의 거점으로 용성국(나가사키) -> 오키나와 -> 리만해류를 타고 싱가포르 -> 중국 복강성 -> 갠지스강 -> 아유타국 -> 아라비아 대상이 비단을 나르는 곳이었다. (14년의 실제 탐방으로 엮어낸 이용기 저 [가락국의 영광])

8. 대마도에서 1천여 리 떨어진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서 일기국(壹岐國)에 이르니 사방이 300리쯤 되었다. 본래 이곳은 사이기국(斯爾岐國)인데 자다(子多)의 여러 섬 사람들이 모두 조공하였다.(대마도의 치소를 중심으로 한 조선분국임) (조선분국 주장설은 김석형.조희성 저 [일본에서의 조선분국] [한단고기] 대진국편)

9. 아라(安羅)는 대마도의 임나로 편입되고 고구려와 더불어 이전부터 화친을 맺었다.말로국(末盧國)의 남쪽은 대우국(大隅國)이라 하는데 그 곳에 시라군(始羅郡)이 있었으며 본래 우리나라 남옥저 사람들이 도래하여 살았던 장소이다. ([태백일사] 대진국편 <광개토대왕비문> 김석형.조희성 저 [일본에서의 조선분국])

10. 신라가 통일한 후 8세기(779년)에 국교가 단절되자 일본은 군사적 및 무역의 요충지인 대마도를 점거하여 조선약탈의 기지로 삼았으나 신라는 통일전과 같이 계속하여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대마도를 관리해 왔다. 특히 9세기 초 이후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신라의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이 있었고 일부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811년 812년 813년 814년경에 대마도에 관리를 파견하고 회사품을 하달한 내용이 있다. (나종우 저 [중세의 대일관계] 중 고려전기 내용 참조 원광대학교 출판부 1996)

11. 고려시대에는 만호(萬戶)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대마도를 관리하였고 진봉선무역(進奉船貿易 : 왜와 대마도가 진상해오면 회사품으로 답하여 많은 생필품을 보냄)을 하였다. 그리고 우왕 3년(1375년)에는 박위를 보내어 대마도의 섬 주민을 보호하고 왜구를 격퇴했다. 이것은 대마도가 고대로부터 우리영토임을 재확인한 과정이다. (나종우 저 [중세의 대일관계] 원광대학교출판부 1996)

12. 세종 원년(1418년)에 있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즉 기해동정(己亥東征) 이후 대마도는 계속하여 경상도 동래부의 소속 도서로 편입되어 조선정부의 통치에 임했다

13. 속주화(屬州化)를 요청한 도주사신(島主使臣)의 요청 내용인즉 "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 ....우리 섬으로 하여금 영토 안에 주군의 예에 따라 주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데로 따르겠습니다. ([세종실록] 2년 윤 1월 10일)

14. 확고한 국가관을 가졌던 세종과 학자 김중곤은 [노비문기(路婢文記)]에 두지(豆之 : 대마도)인이 있는데 대하여 "대마도는 곧 조선의 땅이며 그 곳에 왜인(조선 도래인)이 살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관계되랴"고 말한데서 세종 때의 대마도 인식관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23년 11월 22일)
세종 때 정승인 황희도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땅인데 고려 말기에 국가기강이 허물어져 도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왜구가 웅거하게 되었다는 속주의식을 피력했다. 이와같은 대마도 속주의식은 군신과 학자 일반국민 모두의 머리와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15. 행장(行壯) 노인(路引) 문인(文引) 도서(圖書) 수직왜인(受職倭人) 통신부(通信符) 상아부(象牙符) 등의 각종 통행증을 발급한 것은 대마도민은 우리 속민이었다는 것과 무로마치 막부하의 일본이 스스로 요청하여 통교허가를 받은 것은 일본이 우리조정에 대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실증적 내용이다. 이들 통행증의 왕래와 검역은 거제도 지세포 만호가 담당하였다. ([세종실록] 권 4882 등)

16. 일본 대마도의 수직왜인에게 내린 교지(敎旨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관리의 임명장)는 군신간을 돈독케 하고 임금에 대하여 충성을 다한다는 신하의 책무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교지의 내용을 볼 때 일본과 대마도 주민은 조선의 정치체제 안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들을 보살핀 조선정부의 성의가 내포되어 있다. (중촌영효 저 [수직왜의 告身] [한일관계 연구] 상권 p.585)

17. 세조 때에는 대마도주 종성직의 수직을 추천하던 과정에서 대마도주에게 내린 교서에서는 "경의 조부가 대대로 우리의 남쪽 변경을 지켜서 국토를 보호하게 되었는데 지금 경의 선조의 뜻을 이어서 더욱 공경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며 거듭 사람을 보내어 작명(爵命)을 받기로 청하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 병마도절제사를 제수한다"고 했다. ([세종실록] 7년 8월 28일)

18. 그 후 성종과 연산조의 조정에서 대마도주에게 주는 서계(書契)에서도 "대마주는 우리나라의 속신인데 어찌하여 조선과 대마도를 양국이라 칭하느냐. 너의 도주가 우리조정에 신하라 칭하였으니 대마도는 조선의 일개 주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란 기사가 많이 보인다. ([성종실록] 25년 2월 7일 [연산군일기] 8년 정월 19일)

19. 이황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중국 역대왕조의 대오랑케 정책을 원용하면서 부자관계로 보았다. ([갑신포역절왜소(甲辰包勿絶倭疏)] [퇴계전서] 권6)
또 그는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의미에 대하여 "대마도가 충성을 다하여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수고로운 공적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하사한다."고 하였다. ([예조답대마도주] 권8)

20. 세종 26년(1444년) 일기도 초무관 강권선의 보고서에는 "대마도에 대하여 일본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섬"이라고 하여 일본 본토와는 분명히 다른지역(바로 조선의 섬)으로 파악하였다. ([세종실록] 26년 4월 30일)

21. 김성일이 서장관 허성에게 보낸 답서의 내용에서 "대마도가 우리나라 조정의 은혜를 입고 우리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군신지간이요. 땅으로 말하면 우리의 속국이다."라고 말했다. ([답허서장서] [해사록] 권3)

22. 성종 18년에 대마도주의 서계 내용을 보면 "영원토록 귀국(조선)의 신하로서 충절을 다할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성종실록] 18년 2월 7일)

23. 대마도주 종의지에게 보낸 경상감사의 답사 내용인즉 "우리나라와 일본은 형제와 같이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신의와 화목을 닦아 200여년 동안 조금의 틈도 없었다. 대마도는 우리의 속주로서 조선의 신하로 섬겼으므로 나라에서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세견선의 곡식으로 먹이고 수레의 포목으로 입혔으니 섬의 모든 백성이 조상 대대로 그 덕을 입고 양육받지 않음이 없었다. 그로써 생활하였으니 모두가 상국인 우리나라의 은혜이다." ([조선실록] 2년 8월 7일)

24.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일본(본토)과 완전히 구별하여 대마도를 일본의 행정구역인 8도 66주와는 구별하여 조선영토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작성한 [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25. 17세기(1652년)의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를 중심으로 한 18세기의 <해동도> 및 19세기초 무렵의 <해좌전도> <대동여지도> 등 많은 실증적 지도류에 대마도가 한국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26. 대마도는 고려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진봉선 무역을 하였고 무로마치 막부시대에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적 위치에 있었으며 막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도 독자적이었으며 막부의 사신 호행(護行)도 하지 않았다. (나종우 저 [중세 대일 교섭사])

27. 고려의 막강한 지방정권에 관한 기사로 일기도 구당관(勾當官) 대마도 구당관이 임명되어 대마도는 물론 대마도에서 1천여 리나 떨어진 일기도까지 고려정부에서 섬의 지배자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지방호족들이 보낸 상인사절도 많이 보인다. (나종우 저 [중세 고려의 일본교섭사])

28. 광해군 9년(1617년) 통신사 오윤겸이 쓴 [동사상일록]에 의하면 "지성으로 조선에 대하여 사대하며 시종 한마음을 가져 원원히 조선의 속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이다. 또 이 섬의 인민들은 오로지 우리나라 난육(卵育)의 은혜에 힘입어 생계를 삼고 있는 처지에 있다."고 당시 대마도의 종속관계를 대마도주와 논했다

29. 인조 21년(1643년) 통신사 조경 [동사록]의 망마주(望馬州)에 "조선의 쌀과 베가 배고플 때 너의 밥이 되고 추울 때는 너의 옷이 되었다. 너희 목숨은 조선에 달렸으니 너희들 자손 대대로 우리의 속민이다. 대마도주는 제발 속이지를 마라. 그리고 조선에 충심을 다해 백 년토록 복을 누리라"로 되어 있다

30. 숙종 45년(1719년) 신유한의 [해유록]에는 대마도주와 의례논쟁을 하면서 "이 고을은 조선의 한 고을이다. 태수가 도장(圖章)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하여 속주의 의리가 있다"로 되어 있다

31. 영조 39년(1763년) 조엄의 [해사일기]에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소속이다....이미 조선의 옛 땅에 살면서 대대로 조선의 도서를 받았으며 또한 공미(公米)와 공목(公木)으로 생활하니 대마도는 곧 조선의 영토이다"로 되어있다.
그리고 통신사행의 서기였던 원중거는 "대마도는 일본 내국과는 전혀 다르다. 일본인은 항상 대마도인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사람축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것은 대마도가 한국땅임을 그들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인의 대마도 구분의식은 [풍습(風習)] [대화국지(大和國志)] 등에 나와있다.

32. 18세기 실증사학의 대가 순암 안정복의 문집 권10의 [동사문답]에서 "대마도는 우리의 부속도서이다. 대개 대마도는 신라 고려 이래로 국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속도로 대해왔다"고 했고 [여지승람]에서는 "옛날 경상도 계림땅에 예속되었다"라고 하였으며 태종이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 교서에서도 대마도는 본래부터 우리나라 땅이었다고 하였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증거물이 있다. 그리고 그땅을 정벌한 일은 마땅히 중앙의 속도(屬島)를 꾸짖는 방책이었다고 적어 놓았다.

33. 영조 36년에 제작된 [여지도서]와 순조 22년(182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 등에는 대마도가 "동래부 도서조(島嶼條)"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대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대마도 인식을 보완한 것이다

34. <해좌전도>에 이어 <대한전도> <조선전도 해동도> <팔도전도> <팔도총도> <팔도지도 경상도 부분도> 및 18-19세기의 지도 등에서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나타나 있다.

35. 거리상으로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50Km 대마도에서 일본 규슈의 하카타까지 최단거리는 142Km나 된다. 국제법으로 따져도 명확한 한국의 연안섬이다.

36. 대마현지의 역사유적(승문 및 미생식 문화유적 각종 신사 조선식 산성)과 생활습속 및 동.식물류 돌과 풀 조선언어와 그 곳의 주민 등 그 모두가 우리의 것이다. ([일본사기] [신대마지도] [통신사의 견문록]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내용)

37. 대마 만송원(萬送院)의 종가무덤에서 32대 의화(義和)의 묘비에(1842년 조선 헌종9년) 종삼위 종조신 의화경오묘(從三位宗朝臣義和卿奧墓)라고 크게 쓰여 있다.
종가 말년의 분묘에서(메이지 직전까지) 종가는 조선의 신하로서 역할을 다했다는 것은 그 이전까지도 대마종가는 조선의 가신(家臣)으로 그 의무에 충실했다는 것과 대마도가 조선의 속주임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38. 임진왜란(1592년) 및 한말의 국력쇠잔과 일제의 병탐에 의해 1869년 판적봉환을 이즈하라로하고 메이지 정부는 1877년 중앙집권의 폐번치현(廢藩置縣)에 의거 일본의 나가사키현에 강제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조선의 예속된 땅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39. 대마도의 송포윤임이 지은 [조선통교대기] 권1 원통사공에서도 대마 문적(文籍)에 대하여 "생각컨데 아주(我州:대마도)가 본래 조선 경상도 속도였다는 것이 언제나 일본과 대마도의 서(書)에 보인다. 또 [여지승람]에도 아주를 동래의 속도(屬島)라고 하였다. 조선측에서도 자주 이 구절을 인용하지만 문적([한단고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 이외의 史書)에 관해 토론을 하였다. 뒤에 이익과 안정복 등이 대마속국론을 들고나온 것은 지당한 일이라 본다"라고 하였다.

40. 종가문서를 통해 본 대마도는 각종 서계(書契)에서 1851년(철종 2년)에도 신해년 6월 세견선편에 대마도에서 보낸 서계와 봉진예물을 받았다는 내용 등이 조선과의 속주관계를 증명하고 있다.

대마도가 우리땅임을 밝히는 일본역사자료.

[일본서기]는 양로(養老:일본연호) 4년 720년에 도네리 친황이 천왕 원명에게 바친 것이라고 하며 신대(神代)의 상하로부터 40대 지통천황까지 B.C.667-A.D.697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일본역사서로서 응신기(270년) 이전은 신화. 전설에 의존한 가필임을 일본학자 스스로가 증명한다. (일본서기 비판으로 인해 1942년 5월 21일 와세다 대학의 쓰다 사우기치 교수가 비공개 법정에 섰다.)

첫째 일본역사의 근원이 한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써 두었다.
둘째 4세기 후반에 일본이 성립되었다는 그들의 설과 신공황후의 신라정복설(삼한정복 및 백제 고구려 신민화) 및 임나일본부의 한반도 경영설은 모두 사실무근인 것을 미사여구로 가식하여 집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마도 문제를 풀기위해서 먼저 임나관계를 알아야 한다. 즉 임나는 대마도이다.

1. 일본서기]의 신대성기(神代成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음신과 양신이 성교하여 부부가 된 이후 산월(産月)에 이르러 이들은 담로주(淡路州)를 모태로 대일본을 낳았다." (音陽始 合爲夫婦 反至産時 先以淡路州爲胞...日本) (金聖昊 恩師 韓國편)
이상의 내용은 백제인이 세운 담로가 일본 혼슈(本州)는 물론 규슈연안과 대마 일기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2.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먼 옛날 마한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대마도 일기도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은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 소잔명존은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규슈 내에 있는 고금신라 : 신라소국)에 내려서 소시모리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은 내가 살고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동쪽으로 가 이즈모의 파천 상류에 있는 조상봉으로 갔다. ([일본서기] 신대 상8단)
위의 신라국은 [일본서기] 중애천황 8년 9월조에 나오는 고금신라 및 출운풍토기의 국인신화(國引神話)의 고금신라와 같은 곳으로 규슈에는 도래인이 세운 신라소국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소잔명존 일본의 이즈모로 이주한 것은 옛날 왕검조선 때 대마도 일기도와 규슈 등이 마한의 관경 속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3. 위에서 서술한 내용들은 대마도를 중심으로 한 일기도와 규슈지방이 왕검조선 때부터 우리민족이 이주하여 통치했다는 실증적 자료다. [일본서기]에 쓰여있는 신(神)은 그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지배인들을 칭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내용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섬야노(陝野奴)를 우두천황(스사노오)으로 모신 신사(神祠)를 우두사(소머리데라)라고 부른다.

4. 사로(斯盧) 임나국은 본래 대마도의 서북 어름에 있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히고 국미성에 치소가 있었으며 대마도는 삼한 분치국으로 왜인이 거주하지 않았다. 임나(任那)는 대마도의 전체를 의미한다.(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 有治曰 國尾城 : [한단고기] 고구려편 [일본서기] 이병선 저 [임나대마도] 문경찬 저 [일본상고사])

5. 임나는 지금의 대마도 일기도(一岐島) 및 그 주변 도서내의 10여개국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백제 역사가 안만려(安萬侶)는 [서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임나국이 소나가시치(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하여 왔다. 임나는 축자국(구주 북부 한인의 소국)에서 떨어지기를 2천여 리로 북방의 바다를 경계로하여 계림(신라의 별명)의 서남방에 위치한다.(이 임나기사가 [일본서기]에서 대외관계 내용의 최초이다 : 任那國 遣 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 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 鷄林之西南)
축자는 오늘날의 하카타 지방(傳多 : 후쿠오카) 이요 축자에서 2천여리 떨어진 곳은 바로 대마도였으니 대마도에서 축자국의 거리를 2천리로 한것은 A.D. 237-247년 사이에 빈번히 왕래한 중국 위(魏)사신 제유와 장정 및 왜여왕 비미호의 사자 란승미(難升米) 등에 의하여 측정된 고대사 지리상의 상식이다. 그러한 바 지도상에 대마도의 좌수내(佐須奈)는 악포에서 일기도의 거리와 같고 또한 복강(福岡)의 앞에 있는 말로국과 일기도 거리보다 약 2배의 거리이다. 그래서 [위서] [양서(梁書)] [북사(北史)]는 다 같이 말로국에서 일기도 간을 1천 리의 거리이며 일기도에서 대마도간을 1천리라 하였으니 안만려가 말한 "任那者 去筑紫國 二千餘里"라고 한 지점은 역시 대마도 였음이 분명하다. [일본서기]의 편찬자인 안만려는 그러한 대마도가 북쪽에서 끊어진 바다(北阻海)라 하였다.
대마도의 임나지도를 펼쳐보면 북쪽이 깊고 험난한 해수로 막혀 있다는 본 구절은 대마도의 북방이 한국의 남해라는 사실과 부합된다. 또한 그는 "以在 鷄林之西南"이라 하여 임나는 경주의 서남방에 위치해 있다고 적었다

6. 대마도는 한반도의 남해안에서 떨어져 있으며 임나가라는 이러한 대마도를 중심으로한 일기도와 그 주변에 산재된 10여개의 소도서국(小島嶼國)으로 구성된 연방체였다. 대마도(임나국)와 그 부서에 있었던 10국의 명칭은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嗟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이다([일본서기] 흠명 23년 춘정월기)

7. 대마도를 비롯한 일기국 말로국 축자국 등은 바로 가라 백제 신라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임이 입증된다. 그곳의 풍토기와 무덤형식 및 각종 부장품과 토속적인 한국전통 등으로 옛부터 "한향지도(韓鄕之島 : 한국의 섬)"라 불리웠다.
대마도의 상상도(신라촌) 상하도(고려촌) 하상도(임나) 하하도(백제촌) 등에는 중심부의 고을이 있고 그 주변에 같은 계통의 군소마을이 있었다. 그후 대마 두섬은 임나에 지배되어 섬 전체가 임나국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일본서기]는 밝혔다. 그리고 삼한(三汗)은 분국으로 본국의 삼한에서 파생되어 도래인들이 고국의 명칭을 그대로 본딴 것이다. 대마도 지형의 모든 명칭이 그렇고 일본의 지형 명칭과 분국 역시 한지(韓地)의 이름을 그대로 이식시켰다.(고마 시라기 구마라 아라 가라 등등)

8. 아메노 히보코" 설화는 당시의 한국세력이 대마도를 거쳐 일본열도에서 땅을 개척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일본왕정에서 번영하게 된 경위 등을 진실하게 쓰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

9.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는 대마도라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대마국 대마도 대마주 등으로 쓰여있다. 한자의 음을 빌린 대마란 이름이 중국의 [삼국지] 이래로 널리 쓰여졌다. 대마란 마한과 마주 대한다 하여 부른 이름이다. 대마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 [고대 일본과 대마]에 나와 있다.

10. 일본의 [고사기]에는 "진도(津島)"로 나와 있고 [일본서기]의 신대(神代)에는 "한향지도(韓鄕之島)"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대마도 이름의 뜻과 관련된 것으로 "쓰시마(津島)는 한반도로 가는 배가 머무는 항구와 같은 섬이고 "가라시마(한향지도)"는 바로 한국인의 섬으로서 한국사람이 고대로부터 사는 섬 또는 한반도로부터 사람과 문화가 건너올 때 거쳐온 섬 교역이 이루어졌었던 섬으로도 표현된다.

11. 일본사학자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 [대마도 역사관광]에 나타난 대마도의 소도(卒土)는 마한의 소도와 같은 것이며 다카무스 비노미코도와 데라시스 오오미카미 등의 각종 신화가 조선분국의 존재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 대마도신의 고향은 바로 한국이다.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 [대마도 역사관광])


12. 영락 10년(410년)에 세 가라(대마도 삼한분국)는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任那)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임나연정이라 하였다. ([일본서기] 5王代 [태백일사] 고구려편 이병선 저 [임나대마도] 문정찬 저 [일본상고사] <광개토대왕비>)

13. 대마도의 등정방이 1723년에 편찬한 [대주편년략] 3권으로 구성된 [산가요략기]에는 "대마도는 고려국의 행정치소인 목(牧)이었다. 옛날에 신라사람들이 이곳에 살았고 중애천황(신공황후 섭정)이 대마도 악포(鰐浦)에서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얻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신라는 대마도에 있는 좌호가라 중심의 신라이며 중애천황 8년(199년) 9월조에는 천황이 신라정토의 신탁을 믿지않고 억지로 웅습(熊襲)을 토(討)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본서기]이병선 저 [임나대마도] [한단고기] 고구려편)

14. 가마쿠라 막부시대 중기(13세기 말)에 만들어진 [진대] 11권의 사서(辭書)로서 작자 불명의 권 2에 의하면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다. 사람의 모습도 그 곳에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 모두가 바로 신라의 것이다." 로 되어있다.
이것은 옛날부터 대마도에 신라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대마도가 신라와 같은 곳임을(좌호가라 : 신라) 증명하며 인종적 문화적으로 동질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전 후술하는 모든 내용들이 대마도는 한반도와 지척간에 있는 부속도서로서 우리의 정치 및 문화권에 상존해 있었다는 것은 일본학자들이 증명하는 바이다. 대마도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화유적과 생활습속들에 대해서 [대마도.일기도 종합학술보고서](서울 신문사 1985) 및 일본인이 쓴 [신대마도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15.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었으니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재반사를 보고하도록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요청한 인장과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보낸다. ([세종실록] 2년 윤 1월 23일 [신대마도지]의 응구(應寇)부분 참조)

16. 일본사학자인 중촌영효(中村榮孝)는 그의 논문에서 조선과 대마도의 속지관개(개연성)를 인정하면서 일본측으로서는 대륙을 잇는 생명선과 같은 섬이기에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우긴것에 지나지 않으며 지정학적 여건을 볼 때 조선의 영토이었다고 실토하였다.

17. 송희경은 대마도 정벌 이후 일본에 회례사(回禮使)로 다녀오면서 대마도 만호 좌우문 태량을 만나 "조선과 대마도는 한집안" 이라고 말하고 같은 왕의 신하라고 하여 그들의 칭송을 받았다. ([노송당 일본행록] 2월 21일)
이 같은 주장은 당시 경상도 속주화 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 대마도의 조선 속국관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다.

18. 대마도의 송포윤임이 지은 [조선통교대기] 권1 원통사공(圓通寺公)에서도 대마 문적(文籍)에 대하여 "생각컨데 아주(我州 : 대마도)가 본래 조선 경상도의 속도(屬島)였다는 것이 언제나 일본과 대마도의 서(書)에 보인다. 또 [여지승람]에도 아주를 동래의 속도라고 하였다. 조선측에서도 자주 이 구절을 인용하지만 문헌([한단고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외의 史書)에 관해 토론을 하였다. 뒤에 이익과 안정복 등이 대마속국론을 들고 나온것은 지당한 일이라 본다." 하였다.

19. 종가문서를 통해 본 대마도는 각종 서계(書契)에서 1851년(철종 2년)에도 신해년 6월 세견선편에 대마도에서 보낸 서계와 봉진예물을 받았다는 내용 등이 조선과의 속주관계를 증명하고 있다.

대마도가 우리땅임을 밝히는 중국문헌사료

중국의 25사(史)중에 두번째로 손꼽는 [한서(漢書)]의 지리지 그 이후의 [신.구당서]까지 역대 정사(正史)들이 기원 전후부터 7세기에 이르는 일본관계 기사를 싣고 있다. 중국사서들에 보이는 일본관계 기사들은 양국관계에 치중하여 쓰어진 것들인 만큼 한일 관계사가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것들은 단편적이며 일방적인 경향들이나 전체적으로는 한일관계사에 참고가 된다.
중국사서들의 일본관계 서술에는 편찬 당시의 왜인과 왜땅에 대한 것을 주로 실었고 역사적으로 소급해서 서술한 것들은 대체로 선행한 사서들의 내용을 그대로 전사한 것들이 허다하다.
[한서]지리지에서는 일본열도를 밝히고 그 섬안에서 왜인들이 100여 국으로 분립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1. 대판만(大阪灣)에는 담로와 일치하는 담로도(淡魯島)가 있었다. 일본열도 내에 한국어 계통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A.D 18년에 공주(熊津)에 도읍한 비류백제는 처음부터 많은 세력이 바다를 건너왔다. ([주서(周書)]와 [수서(隋書)])
규슈(九州)에는 7개의 담로가 있었다.(정상광정(井上光貞)) [일본국가의 기원]) 서기 100년경에 이미 규슈지역의 키 작은 원주왜인( : 고고학상의 키작은 남방계 단신임)을 정복하고 비류백제 왕실의 자제(子第)([양서(梁書)] 백제전)가 담로주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담로가 많이 있었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2. [위지동인전] 왜인전의 3세기 대마도 모습의 기록은 대마도가 대마국으로 표기되어 있고 [한단고기] 고구려편에는 혼슈 규슈 대마도에는 본래의 왜인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곳 주민들은 곧 우리나라 도래인(度來人)을 뜻한다.

3. 한국영토의 남쪽 구야한국(가야)에서 바다를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그 곳의 대관(大官)을 "히고"라 하고 부관을 "히노모리"라고 불렀다는 대목의 "대마국도"가 있는데 이것이 최초의 쓰시마(對馬) 기록이다. 또한 위지의 편집자는 "진(津)의 島"라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즉 쓰(津)는 배가 닿는 곳이니 배가 닿는 섬이라는 뜻으로 쓰시마(津島)로 표기해야 옳았고 [고사기]에도 쓰시마로 되어있다. 또 하나의 유력한 설은 한국어의 해설이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 섬에서 유래된 말로서 한국어의 두 섬이 두시마에서 쓰시마로 되었다는 설이다.
위의 내용들을 놓고 볼 때 3세기 이전부터 대마도가 바로 구야한국(가야)에 속했다는 것이 [삼국사기] 실성왕 7년편과 [가락국기] 6대 좌지왕 2년의 기록 및 [대동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4. 구야한국(금관가야)에서 1천여 리 떨어진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서 대마국에 이르니 사방이 400여리쯤 되었고 그 곳에 조선 도래인이 주거하고 있었다. ([위지왜인전]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5.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한국침략을 위하여 왜를 두둔하고 끌어들이는 입장이었다. [한서] [위서] [신.구당서] [진서] [송서] 등이 그것이다. 중국 사서의 5세기에 실린 일본기사 가운데서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등의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정권을 위임받은 총독)의 칭호를 받았으므로 역대 일본학자들은 이때 일본정권이 바다건너 한국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증거로 삼아 이 부분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들은 일본왕실의 일방적인 가필이며 그 당시에는 일본열도 내에서는 통일왕정은 없었으므로(통일왕정은 7세기 후반임) 도래한 한국 소국 중에 대마도를 근거한 임나연정왕의 증거임이 이미 드러났다.(<광개토대왕비문> : 왕 10년(400-479)후에 대마도에 임나연정이 수립되었고 5왕(찬 진 제 홍 무)은 곧 대마도의 임정왕을 칭함). (김석형.조희성 저 [일본에서의 조선분국] <광개토왕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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