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5-12-10 00:00
처용을 만나다(울산지구답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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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스스한 눈으로 창을 열자 마당 한가득 눈으로 가득 쌓여 있고 내 차는 눈으로 뒤덮여 거대한 눈사람처럼 보였다.瑞雪인 첫눈이 반갑다는 생각에 앞서 오늘 답사는 어떻게 하나 하는 야박한(?) 생각이 앞섰다. 부산스레 전화를 걸어 아침잠을 깨우며 눈 소식을 전했으나 답사지인 울산도 경주도 눈이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첫눈 온 풍경들을 추억하려고 카메라를 들고 잠시 나섰다. 먼 산도 들녘도 햇살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풀들도 모두 눈 털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학성공원은 아직은 가을이라고 찬 바람이 불어와도 가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털머위가 노란 꽃을 피우고 배풍등 열매가 붉은 빛으로 투명하고 익어가고 단풍잎이 고운 빛깔을 간직하고 있었다.
학성(울산왜성)은 신라의 계변성이라 하던 곳에 선조30년(1597) 임진왜란 왜장 가또 기요마사가 인근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그 돌로 쌓은 왜성으로 우리 측에서는 이를 도산성이라 하다가 뒤에 학성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외곽의 동서북 삼면에 토제를 쌓고 그 위에 삼중의 목책을 설치한 길이 2400여m로 남쪽은 태화강과 면해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학성공원에는 /봄편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봄편지는 울산 사람 서덕출(1906- 940 호: 신월)의 글로 한국아동문학의 대표작으로 오래 기록될 작품이다. 내가 황성공원을 송아지 노래비가 있고 봄날 목월백일장이 열리는 곳으로 기억하듯 참꽃마리님에게도 학성공원은 백일장장소로 기억되고 있었다.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 옵니다/
일제하에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발표와 동시에 주목을 받게 되는 이 글은 나중에 윤극영이 곡을 붙여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빼앗긴 나라 잃어버린 나라로 비록 헐벗고 가난하여 앞날이 암담하였지만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 옵니다./란 노래말은 일제에 눌려 지내던 우리 겨레의 가슴에도 희망의 봄을 새겨주는 노래가 된 것이었다. 노래비에는 /조선/이 /대한/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고려명종때 사람인 김극기의 태화루 시서에 이르기를 /자장율사는 신라사람이다. 정관 12년 무술에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서 중국에 법을 구하고 17년에 동으로 돌아오다가 사포(지금의 태화지방)에서 쉬면서 여기에 자리를 잡고 이 절을 세운 것이다./하며 태화사 터를 잡은 동기를 밝혀두고 있는데 태화사의 금당지는 반탕골(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일원)로 생각되나 이 절이 신라 10대 사찰의 하나로 꼽혔다고 하니 오늘의 통도사를 감안한다면 화진마을 등 그 일대를 차지하였던 큰 절이었을 것이다.
태화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태화 반탕골의 산비탈에 묻혀 있었던 십이지상 부도 한 기가 남아 보물로 지정되어 학성공원에 안치되어 있을 뿐 그 확실한 자리는 알 수가 없다.

태화사지12지신상부도는 장방형의 수석과 종형의 탑신부로 된 간략한 조형이다. 대석은 전면에 3품 좌우에 2품씩으로 된 안상이 있으나 뒷면에는 없다. 탑신의 높이는 110cm하경 90cm로 화강암으로 된 것이고 아무런 시설이 없는 대석의 상면중앙에 놓여 있고 하부에 좁아진 듯 하면서 수직으로 올라가 어깨부분에서 완곡되어 반구형을 이루어 맨 윗부분은 튀어나와 있다. 탑의 특징은 윗부분에 깊이 판 감실과 아랫부분에 새겨진 십이지상이다. 감실은 십이지상 바로위를 기저로하는 첨두마제형으로 깊숙히 파져있다.

망해사지 자리에는 문수사라는 새로운 사찰이 위치하고 있었고 대웅전터와 서로 규모와 양식이 같은 신라말 또는 고려초기로 추정되는 팔각원당형 부도 2기가 동·서로 자리하고 있고 조선시대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종형 부도 1기와 석탑재로 보이는 석재 유물들이 남아 있었다.
망해사지에 남아 있는 이 부도들은 신라 헌강왕(재위 875년~886년) 때에 망해사를 세우며 같이 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국내 最古의 부도가 844년(9C 중엽)에 제작되었으며 석남사 도의선사 부도가 9C 말 ~ 10C 경(880년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때 망해사지 부도는 10C~고려 초기 때까지 볼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통일신라(9~10C) 작품으로 단정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동 서부도는 거의 똑 같이 생겼지만 세밀히 검토해 보면 상대석의 단엽연화 부분이 서로 다르다. 상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잘 구분되지 않으며 차분히 살펴보면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망해사지 부도는 신라말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나 조각기법에서 신라말의 타 부도들과 비교해 볼때 세밀하지 않고 대부분 형식적으로 처리된 느낌이 있다. 중대석은 각 우각에 기둥형이 조각되어 있고 상대석은 3단의 각형위에 단엽연화가 6판씩으로 2중 조각되어 있다. 각 우각에 주형을 새긴 탑신의 전후좌우 4면에는 호부를 새겼으며 부서진 부분을 들여다 보면 그 곳에 사리공이 있을 만한 공간이 있다. 2기중 동쪽 것은 일찍이 무너져 땅에 방치되었는데 1960년 11월에 다시 세웠으며 상륜부는 둘 다 없어졌다. 지붕돌은 처마와 추녀가 수평으로 넓으며 각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들이 있다.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조(三國遺事2卷-2紀異-處容郞望海寺)에 따르면 망해사(望海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와 처용과 처용가에 얽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처용은 동해용의 일곱 아들중의 하나로 나와 있으나 아마도 괘릉의 무인상에 보이는 페르시안 계통의 서역인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한편 조선 중종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울산읍지]에는 일명 신방사(新房寺)라고도 불리운 이 사찰 옆에 망해대가 있어 선비들이 이 대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고 글을 짓거나 시를 읊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그 자리를 찾을 수 없다.

영축사의 역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외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고 건물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서 절의 윤곽조차 알 수 없다.
우리나라의 쌍탑이 본격적으로 세워진 것은 신문왕때 부터이다. 영축사지의 탑은 웅장하지는 않지만 부드러움이 있으며 선이 약하다. 또한 받침대만 있는 귀부는 비록 미적인 면에서는 많이 뒤떨어지지만 쌍탑과 돌거북이 함께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축사지의 유적들은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동쪽 탑 옆에 놓여 있는 귀부는 머리부분과 웟 부분이 파괴된 채로 비신 흔적만이 확인될 뿐이지만 아직도 내려진 앞발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귀부는 울산지역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현재 허물어져 있는 두 개의 석탑은 3층인데 동탑의 탑신부에는 사리장치(舍利裝置)를 안치했던 사리공이 있다. 하지만 동 서탑과 귀부 모두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다. 손상된 부분은 석조물의 표면 전체이며 인위적으로 훼손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마도 이 곳에 있는 문화재를 훼손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집단이나 종교적인 이유로 손상되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쫒긴 왜군은 축성과 양식 확보의 계획을 세웠는데 남해안의 중요 지점을 기점으로 해서 한강 이남의 4도를 차지할 목적으로 선조 26년(1593)에 전라도 순천에서 경상도 서생포 사이에 30개의 왜성을 쌓았다. 서생포왜성은 부산왜성에 이어 3번째로 지은 석성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수송이 용이하여 전쟁기간동안 왜군의 중요거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서생포왜성은 선조 25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1593)에 완성한 것으로 그 내부가 45960평에 달하는 거대한 석성이다.
산의 정상부에서 아래로 성벽을 겹으로 두르고 성벽은 기울기를 많이 가지는 특징이 있어 16세기 말기의 일본성곽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석축 성벽만 남아 있지만 비교적 완연하며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우리측에서도 사용했던 성이다. 이 성은 기장왜성과 임랑포왜성 자성대왜성 동래왜성 및 울산왜성(학성)과 봉화로 서로 신호연락하였다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한다.
이 왜성에서 왜군이 물러간 것은 선조31년(1598) 명나라 마귀제독(麻貴提督)이 정유재란때 왜군을 대파하고 탈환했다.
임진왜란 동안 이 왜성에서는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 사이에 휴전회담이 4번이나 열렸다. 당시 사명대사는 웅촌에 있는 운흥사에 머물면서 이 왜성으로 와서 회담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회담은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비록 실패를 했지만 사명대사는 이 회담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의 당당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왜군은 조.명연합군에 패배하여 퇴각하면서 조선인 서생포왜성의 축성자를 일본으로 포로로 데리고 갔고 현재 일본에서 유명한 구마모토성을 석축하는데 동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후손들이 구마모또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서생포 왜성을 방문하였다. 그들의 성씨는 /서생/이라고 한다.

서생포왜성을 오르는 길에 바라다 보이는 겨울바다는 잔잔하기만 하고 바다를 향한 기원과 그리움이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다 .
복원되고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서생포왜성을 둘러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침략과 수난의 역사도 역사이며 역사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부끄러운 역사라 해도 가릴 수도 없앨 수도 없는 일이라는.
중앙청으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했던 옛 조선총독부청사를 해체하던 일의 당위성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일제잔재를 없애는 동시에 경복궁 일대의 대대적인 문화재복원사업을 내세우며 국가적인 사업이자 민족적인 대원(大願)으로 밀어붙이기식의 조선총독부청사 해체사업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너무 복원하는 일에만 매달려 추진되는 것처럼 보이던 것도 못마땅했다.
1916년 일제가 식민통치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경복궁근정전 앞에 세워 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여 왔지만 조선총독부청사를 해체하는 것으로 일제잔재가 청산되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근대건축이 도입되는 시기의 건축물로서 역사적인 자료가치를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해체 복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논리라면 서생포왜성은 이미 오래전에 없앴어야 하지 않았을까?... ...

망해사 연기설화에 의하면 용의 아들인 처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이 바위를 처용암이라 한다.
아내를 용서하며 춤추고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처용의 마음을 만나러 간 처용암에는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 마음을 움츠리게 하고 저물녘 햇살만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여 일렁이고 있었다.


덧붙임
2005년의 마지막 답사는 첫눈이 내려서 더 행복했고..
무거운 렌즈가방 묵묵히 옮겨주시고 산길에 동무해 주신 박용환님..
서생포왜성 오를 때 꼴찌 끝까지 챙겨주신 이종순님 고맙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이렇게 나 자신과의 약속하나를 지킬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또 한해를 보내며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온 글귀가 화두로 다가온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자기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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