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5-11-12 00:00
가을풍경이 되어 (보문암곡지구답사)
 글쓴이 : 백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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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감동을 느낌들을 그대로 글로서 표현할 수 있다면.
눈으로 느낀 아름다움을 그대로의 자연을 카메라 앵글에 담아 낼 수 있다면
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정확한 내 마음과 감정들을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언제나 보이는 만큼 느낀 만큼 아름답게 표현하고 전달해 낼 수 없음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가을은 산에도 들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그득 자리하고 있었다..

늦은 저녁부터 내리는 비는 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비 오는 가을날 풍경도 나름으로 고울거라고 위로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잠을 깼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오늘 아침 따라 햇살의 눈부심이 왜 그리 반가운지..

가을의 끝자락에 다시 찾은 진평왕릉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구월의 푸르름을 되살려 기억해 보지만 들녘도 포풀러나무도 온통 가을색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란 다 비슷한가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멀리 남산과 확 트인 들녘이 보이는 곳에는
사람들에 의하여 능을 오르는 작은 길이 흔적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추수 끝난 빈 들녘 한가운데 가을과 천년의 이야기속의 사람들이 시간속으로 저만치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간간히 햇살아래 비 뿌리는 들녘 한가운데 연화문 당간지주는 가을풍경으로 서 있었다.
양쪽 지주의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부분이 두드러진 형태이며 꼭대기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너비 13㎝의 큼지막한 구멍을 두었다. 특히 지주의 윗쪽 바깥면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8장의 연꽃잎을 돌려 새겨 놓았는데 이처럼 당간지주에 연꽃잎을 장식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가을 들녘에 장승처럼 여기가 시간 저 너머의 절터였음을 말해주는 듯 의연하게 서 있었다. 보문사터 서탑지 당간지주 석조등도 들녘 한가운데 섬처럼 아무런 보호시설도 없이 철책으로 둘러져 있었다. 보문사지 금당터 주변에는 논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석조물들이 아직 추수하지 않은 벼들 속에서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가을들판에는 억새가 바람에 햇살따라 일렁이고 먼 산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모두들 소풍나온 아이들마냥 즐거워하면서 가을 속에서 가을풍경의 하나가 된 듯 했다.
이제 들녘을 나서도 쑥부쟁이 산국 열매종류들 등만 보이고 꽃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 된 듯하다.. 풍요와 수확의 들녘에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명활산성에서 바라다보는 보문은 가을이 이미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팥배나무에는 고운 열매가 붉게 익어가고 아직은 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아카시 잎들은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거리고.
명활산성은 사적 제47호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실성왕기(實聖王記)>에 405년(실성왕 4년) 왜병이 명활산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인 것만은 확실하다. 축성방법 역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기의 방식이다. 즉 왜의 침략이 극심한 때를 전후하여 왜적침입 대비목적으로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쪽의 선도산성(仙桃山城) 남쪽의 남산성(南山城)과 함께 당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점심을 먹으러 들린 곳에는 마당 한켠에 무쇠솥이 걸려 있고 김장독으로 사용했을 큰 장독들이 있고 멍멍이들이 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정겨운 풍경들이다.
어릴적 마당에 무쇠솥이 걸리고 불을 지피면 뭔가 늘 흥겨운 일들이 있고 집안에는 손님들이 넘쳤다. 멍멍이들은 늘 나를 맨 먼저 반겨주는 좋은 친구였다.

무장사지 가는 길은 사람이 가을풍경의 일부가 되어 그대로 그 속에 스며든 듯하다..
계곡에서는 맑은 물소리가 들려오고 바람결 따라 단풍이 우수수 비 오듯 쏟아지고 잠시 시간이 그 속에서 멈춰주었으면 하는 행복한 길이였다..
무장사지를 가는 길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 풍경에 취해서 지나쳐서 한참을 올라가서 되돌아 내려와야만 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장항리사지에서처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삼국유사에도 "그윽한 골짜기가 아주 떨어져서 산은 깎아선 듯하며 장소가 침침하고 깊숙하여 주위가 절로 적적하니 이야말로 마음을 휴식하고 도를 즐길 수 있는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하였다.

무장사지 아미타조상사적비는 비신은 없고 이수 및 귀부만 남아 있다.
1915년 근처 사람들이 빨래판으로 쓰고 있던 비석파편이 발견되어 이 석조물이 무장사지아미타조상사적비이고 이곳에 무장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쌍귀부의 머리부분은 둘 다 잘려 있고 이수의 오른쪽부분도 깨어지고 없다. 귀부의 발은 형식화되어 있고 귀부의 등 중앙에 사각형의 비석받침(앞면의 폭은 약 120㎝ 그 높이는 20㎝ 가량인데 실제로 십이지상을 조각하는 공간의 크기는 가로 24㎝ 세로 13.5㎝ 가량 되었다)을 만들고 그 네면에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다(앞뒷면에는 각 십이지상 넷 측면에 각 십이지상 둘씩을 조각하였다). 뒷면의 왼쪽에서 두 번째에 조각된 쥐 그 옆(뒷면의 왼쪽에서 세 번째)이 돼지 및 오른쪽 옆면(왼쪽 측면은 깨어지고 없다)의 왼쪽에 있는 용은 그 새김이 선명하고 생동감이 있어 보이지만 나머지는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귀부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예는 드물다. 이수의 앞뒤 각 면에는 용 두 마리가 구름 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맞잡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귀부와 이수는 보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장사지 삼층석탑은 이 탑은 원래 넘어져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63년에 탑재(塔材) 일부를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세웠다.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상층 기단부에 탱주를 두지 않고 면석 3면에 2개의 안상(眼象)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이와 유사하게 상층기단부에 안상을 새긴 탑으로는 경주남산 남산리 계곡의 한 지류인 승소곡(僧燒谷)에서 경주박물관내(박물관 들어서면서 왼편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로 옮겨온 승소곡 3층석탑이 있는데 승소곡 3층 석탑에는 상층기단 뿐만 아니라 1층 옥신에도 안상을 새기고 특히 1층 옥신의 안상 안에 사천왕상을 새긴 점이 무장사지 삼층석탑과 다르다. 보물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 의하면 태종이 삼한을 통일한 후 병기와 갑옷을 이 골짜기 속에 간직해 두었다 하여 이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지었다 라고 한다. 김호상선생은 무장사지에 가면 마음속에 품었던 칼을 꺼내 묻고 와야 한다고 했다. 정호승시인도 /꽃을 보려면/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잎을 보려면/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어머니를 만나려면/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덧붙임.
일상은 늘 분주하고 여유가 없다
살아가면서 살아온 시간만큼 경험과 나름의 지식이 쌓여 가면 그만큼 하는 일에서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초년병 시절에 일을 처리하던 시간보다는 훨씬 더 적은 시간이 소요되어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하루를 더하면 더한 것만큼 시간과 여유가 없어진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 친구는 그만큼 기술과 세상이 급속히 진보하여 따라가기 급급해서라고 한다.
주말 가을나들이에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먼 별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다.
일상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꾸만 즐거웠던 먼 별로의 여행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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